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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의 시선] 회귀물에 매료된 한국 사회

중앙일보

2025.07.28 08:18 2025.07.2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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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편집국장대리
한국 사회가 회귀물 시대를 맞고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장안의 화제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주인공이 되살아나고 과거로 되돌아가 승승장구하는 스토리가 대중문화 곳곳에 넘쳐난다.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은 전 세계적으로 140억 뷰라는 초대박을 기록했다고 하고, 역시 잘 나가던 웹툰 ‘전지적 독자시점’은 이번에 영화로 개봉됐다. ‘재벌집…’ 이후 ‘어게인 마이 라이프’, ‘내 남편과 결혼해줘’, ‘선재 업고 튀어’ 등 회귀물 드라마는 외연을 확장해 재생산되고 있다.

좌절한 청춘, 인생리셋 대리만족
개천서 용 나오게 자원 우선배분
사즉생 방불 도전 의지 북돋워야

회귀물이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도 아닌데 ‘회귀물 천국’이라며 호들갑을 떤다고 일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진지하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 웹툰·웹소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회귀물이며, 요즘 가장 일반적인 흥행 공식 역시 회귀물”이라고 말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도 “당초 웹툰·웹소설에서 시작됐던 회귀물이 드라마·영화 등 다른 분야로 확장하면서 이젠 회귀라는 소재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됐다”고 분석했다.

대중문화는 사회 저변에 깔린 욕망과 심리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회귀물이 유행하는 건 “그때 OO했다면…”, “그때 OO하지 말았어야”라는 후회가 한국 사회에 축적돼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회귀물은 지금 우리 사회가 집단적 우울감에 빠져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물론 회귀 자체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과 같은 ‘왓 이프(what if)’적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반면 회귀물은 그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다. ‘10년 전으로 되돌아가 비트코인을 샀다면’처럼 과거로 되돌아가 나의 선택을 바꾼 뒤 성공하고, 때로는 복수까지 한다. 그래서 회귀물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뒤엎는 대리만족의 서사다.

대중문화 전문가들은 회귀물이 젊은 세대의 놀이터인 웹툰·웹소설에서 가장 먼저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현실에 좌절한 청춘들은 죽음을 경험한 뒤 되살아나 일거에 인생을 역전시키는 판타지에 매료됐다. 지금 나의 삶은 고단하지만 되살아난 나는 전생의 경험으로 미래를 알고 있으니 비즈니스에서 엄청난 성과를 내고, 연애에도 능숙하고, 악인들의 속내를 미리 알아 멋지게 복수하며, 돈 되는 분야를 선점할 수 있다. 정덕현 평론가는 “과거엔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 까치가 극한의 고난을 이겨내는 극복의 서사가 있었다면 지금 젊은 세대엔 그런 성공 기대감이 없다”며 “이생망 정서가 회귀물이 유행하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도 “1990년대 흔히 볼 수 있었던 성공시대형 드라마들이 지금은 찾기 어렵다”며 “회귀물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때 한국엔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가 있었다. 가난과 무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용’을 만들기 위한 희생을 마다치 않던 시대, 나의 현재보다 내 자녀들의 미래는 더 좋아질 것이라 확신했던 시절이 있었다. 20여 년 전 동남아에서 근무하다 본부로 복귀했던 한 외교관은 복귀 축하 저녁 자리에서 “내가 있던 나라에선 자식 세대가 지금보다 더 잘 살 것으로 기대하지 않고 또 그걸 다들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어떻게 미래가 현재보다 못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어느새 한국에선 ‘현재보다 못한 미래’라는 비관론이 낯설지 않다.

이처럼 회귀물의 유행은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미래에 대한 불신이 한국 사회에 쌓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화적 신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를 재확인하게 된다. 사회가 존속하려면 젊은 세대가 진입할 일자리를 계속 만들고,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그물망을 갖추는 게 가장 시급하다. 회귀하지 않아도 현실에서 노력하고 도전해 개천을 벗어나는 사례가 축적되는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원 배분의 최우선 순위를 청년 일자리 창출, 창업 지원 등에 놓고, 다른 가치는 과감히 뒤로 미루는 선택도 감내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기회와 함께 중요한 건 ‘하면 된다’는 용기와 이를 지속하는 의지에 있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위로만으론 무의미하며, 위로는 위로받은 이들이 다시 힘을 얻고 현실에 도전할 때 완성된다. 회귀물은 늘 죽음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현실에선 누구도 실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현실을 리셋하고자 한다면 그에 버금가는 극한의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타포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어쩌면 회귀물의 숨은 메시지는, 죽기를 각오해야 산다는 ‘사즉생(死卽生)’에 있는지도 모른다.





채병건([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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