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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대기만성(大器晩成)과 황보밀(皇甫謐)

중앙일보

2025.07.2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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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에서 침구(鍼灸)는 중요하다. ‘침’은 인체의 침구학적 경혈(經穴)을, 쓰임에 따라 굵기와 길이가 다른 가느다란 금속 바늘로 직접 찌르며 치료하기 위한 도구다. ‘구’는 경혈, 즉 혈자리를 외부로부터 열기로 자극하기 위해 ‘뜸 뜨는’ 도구다.
이번 사자성어는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대, 그릇 기, 늦을 만, 이룰 성)이다. 앞 두 글자 ‘대기’는 ‘큰 그릇’이다. ‘만성’은 ‘천천히 완성되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큰 그릇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즉 그릇이 큰 인물은 다소 늦게 성공한다’란 의미가 만들어졌다.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된다.’ 노자 ‘도덕경(道德經)’ 41장(章) 후반부의 이 구절에서 유래했다. 황보밀(皇甫謐. 215~282)의 삶은 ‘대기만성’, 이 네 글자와 꽤 잘 어울린다.
의학자 겸 역사가 황보밀은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모친과 사별하고, 숙부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숙부와 숙모의 기대와는 달리, 학동 시절에 그는 학업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청소년기가 한참 지난 이후에도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무책임한 일탈 행동을 일삼았다.


“너는 지금 스무 살이다. 그런데도 하는 짓이 여전히 어린애와 같다.” 숙모가 하루는 작정하고 이런 신랄한 말로 시작되는 훈계를 한다. 생모(生母) 못지않게 한결같이 헌신적이던 숙모의 첫 질책이었다. 정문일침(頂門一鍼)과도 같은 이 따끔한 조언을 접하고, 그는 바로 새로운 청년으로 변모했다.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매일 책 속에 파묻혔다.
독서광으로 생활하며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이렇게 30세에 이르자 그의 이름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그가 관심을 가진 학문은 요즘 기준으론 문학, 인구통계학, 의학 등 다양했다. 특히 문학 분야에서는 당대 최고 문학가가 저서 서문을 부탁하기도 했으니, 조예가 깊었다.


40대 초반, 그는 또 한 차례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갑자기 뇌졸증이 발병해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됐기 때문이다. 침구 치료를 통해 증세가 차츰 호전됐고, 최악의 상황에선 벗어났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불행을 놀랍게도 그는 중국 전통 침구학 연구에 몰두하는 계기로 삼는다. 수집한 여러 의학 서적을 탐독한 것은 물론이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명의들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유능한 한의사가 된 이후, 그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관직 제안에 그는 초연했다. 하루는 지인이 이렇게 그를 설득했다.

“벼슬길에 올라 출세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도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길 아닐까요?” 이 말을 받아 황보밀이 자신의 처세 철학을 가감없이 들려준다. “여러가지 거짓말, 아첨, 알력 등이 만연한 그런 곳에서 관리들 틈에 끼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고 싶진 않아요.”


시력까지 약해진 50대에도 그는 여전히 독서에 힘썼다. 관직은 극구 사양하면서도 한 권이라도 책을 더 읽으려는 마음에, 왕에게 책을 빌려달라고 청한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황보밀의 삶은 황혼기에 접어들자 자연히 열매가 많아지고 향기도 진해졌다. 그가 저술 활동에 더욱 집중했기 때문이다. 역사서 ‘제왕세기(帝王世紀)’, 그를 침구학 비조로 자리매김해준 의학서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 철학서 ‘주역해(周易解)’ 등 탁월한 서적들을 집필하거나 편찬해 차례로 세상에 내놓았다. 향년 67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대기만성’을 영어로 의역하면 ‘A late bloomer’다. 대략 중년기 이후에야 비로소 두각을 드러내며 성공의 첫 열매를 수확하는 인물을 표현할 때 쓰인다. 비슷한 말로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쓰이기도 한다. 그 맞은편에는, 프랑스 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La torture par l’esperance)’을 축약한 표현에서 출발해 유행어가 된 ‘희망고문’이란 신조어가 자리할 것 같다.


그러나 ‘고진감래’와 달리 ‘대기만성’에 도달하는 그 긴 여정에는 꼭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천진난만할 정도의 어리숙한 마음으로, 마냥 즐기며 뭔가에 매진했던 이들이 ‘대기만성’했던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싶다.

홍장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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