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비핵화 논의는 우롱"이라는 대미 담화를 발표한 데 대해 대통령실이 북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명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북·미 회담 재개를 촉진하는 여건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같은 담화에 대한 입장을 내놓으며 미국은 "완전히 비핵화된 북한", 일본은 "북한 핵·미사일 폐기"를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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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는 상대방 우롱"
김여정은 이날 담화에서 "우리 국가수반과 현 미국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면서도 "조미 수뇌들 사이 개인적 관계가 비핵화 실현 목적과 한 선상에 놓이게 된다면 그것은 대방(상대방)에 대한 우롱으로밖에 달리 해석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18~2019년 세 차례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간 우호 관계를 부각하면서도 비핵화라는 의제 자체를 테이블에 올리지 않겠다고 일축한 것이다.
김여정은 이어 "우리 국가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를 언급하며 "지정학적 환경도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어 북·미를 "핵을 보유한 두 국가"로 칭하며 미국을 향해 "새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접촉 출로를 모색해보는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미국이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패한 과거에만 집착한다면 조미 사이 만남은 미국측의 '희망'으로만 남아있게 될 것"이라면서다.
최근 핵 무력 증강으로 북한의 지정학적 위상이 달라졌으니 북한이 일방적으로 핵을 포기하는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 북·미가 대등한 입장에서 군축 협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김여정은 "(북한은) 현 국가적 지위를 수호하는 데 있어 어떤 선택안에도 열려 있다"고도 했는데, 비핵화만 아니라면 대화도 할 수 있다는 '조건부 협상 재개'를 시사한 셈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근본적 정책 전환을 하지 않으면 미국과 기존 방식의 대화는 없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북한은 비공개 접촉보다는 미국의 공개적인 입장 변화가 있어야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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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 언급 뺀 대통령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이날 오전 "한·미는 한반도 평화 및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대화에 열려있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혀왔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앞으로 평화 분위기 안에서 남북 간 신뢰를 회복하고 북·미 회담 재개를 촉진하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로 표현하며 대화라는 방식만 강조했을 뿐 김여정이 부정한 비핵화라는 목표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가 없었다.
이는 미국, 일본의 반응과 대비된다. 백악관은 해당 담화 관련 로이터통신의 질의에 "(트럼프) 대통령은 완전히 비핵화된 북한(a fully denuclearised North Korea)을 달성하기 위해 지도자 김(정은)과 소통하는데 여전히 열려 있다"고 밝혔다. 대화에 방점을 두면서도 그 전제는 어디까지나 '비핵화'였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관방장관도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에 "북한의 핵·탄도 미사일 계획 폐기를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역시 '북핵 폐기', 즉 비핵화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김정은의 '입' 역할을 하는 김여정의 노골적인 비핵화 부정 담화에 대통령실이 선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건 북핵의 가장 큰 위협 아래 놓인 당사국인 한국이 잘못된 신호를 발신하는 격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그래서 나온다. 특히 최근 국제사회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진의를 알 수 없는 "북한은 핵보유국(Nuclear Power)" 발언을 비롯해 북한 비핵화 목표가 흐려지고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통일부 역시 대통령실과 같은 입장을 발표했고, 정부 차원에서 나온 입장 중 비핵화를 언급한 건 이재웅 외교부 대변인이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에 한·미 간 견해가 일치한다”고 밝힌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이는 대북 군축 협상에 대한 질의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으로, 대통령실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비핵화 원칙을 거론하지 않은 데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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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연속 '잘못된 신호' 우려
특히 전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한·미 연합훈련(UFS)을 비판한 김여정의 대남 담화에 호응하듯 "이 대통령에게 훈련 조정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이 "통일부뿐 아니라 국방부 의견도 듣겠다"고 해명하고, 국방부도 "현재까지 (다음 달) 연합연습 시행에 변경은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사실상 북한은 UFS 연기가 가능한 것처럼 받아들일 여지도 있다.
김여정은 이날 미국을 향해 “지금 2025년은 2018년이나 2019년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의 전격적인 연기에서 비롯된 2018년 북·미 협상 국면의 재현을 노리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러면서도 협상 목표를 비핵화가 아닌 군축으로 올려 잡은 건 핵 무력 증강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동맹 관계로 진화한 러시아의 후원, 유화적인 한국 정부의 대북 기조를 발판으로 협상의 판을 키우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북한은 이날과 전날 발표한 김여정의 담화를 북한 주민들이 보는 노동신문 등에는 게재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자리를 박차고 나온 '하노이 노 딜' 등으로 김정은의 위신에 손상이 간 데 대한 상처와 경계심이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