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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 음모론은 보수 멸망을 부르는 전염병 [박은식이 소리내다]

중앙일보

2025.07.29 08:02 2025.07.2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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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은 이번 대선에서 패배했는데도 아직까지 부정선거 음모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이를 다룬 영화를 관람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2008년 4월 이명박 정권 출범 5개월 만에 치러진 18대 총선은 보수 진영의 압승이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실망과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맞물려 한나라당은 153석을 얻었고, 범보수 계열 전체로는 200석을 넘겼다. 반면 통합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범진보는 90여 석에 그쳤다. 정치권에 있던 이들은 당시 한나라당의 위세를 “언터처블”이라 회고한다.

이 무렵 '5.18 북한군 개입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음모론은 보수 성향 커뮤니티에서 전라도 비하 ‘밈(meme)’과 함께 전염병처럼 퍼졌다. 실제 계엄군에 맞서 총을 들었던 광주시민이 공개되며 음모론의 허위성이 드러난 뒤에야 소동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정작 개선이 필요했던 유공자 선정 과정, 유공자 단체의 이권 투쟁, 세금 낭비, 정치 편향 문제들은 음모론 진위 논쟁에 가려져 공론화되지도 못했다.
과거 5·18 음모론, 보수 약화 초래
대선 패배에도 "우리끼리 뭉치자"
이대로는 이재명 정부 견제 못 해


무엇보다 이 음모론은 보수 진영을 양남(영남·강남)으로 쪼그라들게 하는 악재로 작용했다. 호남 주민과 출향민, 그 후손 세대는 반(反) 보수 진영의 핵심 지지층으로 결집했고, 이것이 민주당에 대한 전폭적 지지로 이어져 수도권 탈환과 제1당 등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결국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영남 출신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음모론과 절연했을 때 선거 승리
보수 진영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건, 이런 음모론을 단절하려는 노력 덕분이었다. 음모론자들을 공천에서 배제하고 공개 사과를 유도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5·18 묘역에서 무릎을 꿇었고, 이준석 지도부도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2022년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1987년 직선제 이후 호남에서 최다 득표율을 기록하며 정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훨씬 전염력 높은 ‘부정선거론’이라는 음모론이 또 등장했다. 2020년 21대 총선을 기점으로 보수진영에 확산된 이 전염병은 서울·부산시장 재보선, 20대 대선, 지방선거 승리를 거치며 사그라지는 듯했지만 끝내 대통령까지 감염시켰다. 12·3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선거관리위원회에 국회보다 많은 인원을 보낸 것은 그 방증이다. 광장과 유튜브에서 부정선거를 외쳐왔던 지지자들은 열광했고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지지했다. 지지자들은 대통령을 탄핵으로부터 지켜내라고 국민의힘을 압박했다. 이로 인해 보수정당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적 계엄 시도를 단죄하면서 음모론자들과 절연할 기회를 잃었고, 대선 패배로 정권을 내줬다.

그런데도 보수 진영은 음모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중국인 해커 99명 압송’ 같은 허위 기사에 속아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속고도 이번에는 ‘모스 탄 전 미국 국제형사사법대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끌어들여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졌다. 이미 사직하고 다른 의료기관에 취직한 전공의들에게 “복귀하지 않으면 처단한다”던 반인권적 계엄을 두고 국민의힘 정치인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는 기괴한 컬트 집단의 모습도 보였다.

‘이재명 후보만은 안 된다’는 정서에 기대 국민의힘이 지난 대선에서 41%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는 결코 현재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착각해 ‘우리끼리 똘똘 뭉치면 된다’며 음모론을 떨쳐내지 못하니 정당 지지율이 17%까지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이니 ‘윤 어게인’을 외치는 전한길씨가 보수의 주인을 참칭하며 당권을 향한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막장극도 펼쳐진다. 건국과 산업화·민주화를 모두 이뤄낸 보수정당의 격이 이렇게 떨어진 적이 있었던가. “어디 가서 보수정당 지지자라 하기 부끄러울 지경”이라는 말이 너무 자주 들린다.

보수정당이 부정선거라는 이미 반박된 음모론에 매달리니 연이은 탄핵과 대선 패배에 대한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리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규제 개혁, 기술 혁신, 연금, 저출산, 관세 문제에 대한 해결책 제시에 전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입각한 여당 인사들의 비리와 이재명 정부의 현금 살포같은 포퓰리즘을 지적해도 설득력이 없다. “선거 지면 또 부정선거라 할 거잖아. 수틀리면 또 총 들고 계엄하겠지”라는 냉소가 가득한데 누가 보수정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부정선거론과 단절해 신뢰 회복해야
보수정당은 정신 차려야 한다. 지금은 대단한 혁신보다 눈앞의 전염병부터 막아야 할 때다. 전염병은 격리, 백신, 치료제가 해법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코로나 팬데믹을 마주한 책임 있는 의사의 심정으로 음모론을 퍼트리는 인사들을 출당시켜야 한다. 부정선거가 왜 아닌지에 대한 팩트를 치료제로 주고, 국민적 의구심을 잠재울 선거제도 개편을 약속하는 백신을 제공해야 한다. 전염병은 면역이 약할 때 감염된다. 음모론도 마찬가지로 슬픈 현실을 단번에 바꾸고 싶은, 이른바 ‘도파민 터지는’ ‘큰 거 한 방’을 찾는 이들에게 퍼진다. 그러나 그런 만병통치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수주의는 고통스럽더라도 허구에 빠지지 않고, 한 명 한 명을 설득해 점진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철학이다. 보수세력이 음모론에 무너진 현실을 직시하고 음모론을 먼저 단절한 다음, 하나하나 차근차근 재건해 나가야 한다. 전염병은 두렵지만, 이겨내면 항체가 생기며 건강해진다. 음모론이라는 전염병을 떨쳐내고 강건한 체질이 돼야 한다.

박은식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내과 전문의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은식([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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