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산골에서 뜨거운 여름을 건너는 방법은 친구들과 개울의 소(沼)에 모여 목욕하는 게 전부였다. 물도 제법 깊었고 넓은 바위들이 널려 있어 젖은 팬티를 짜서 말리기에도 좋았다. 게다가 반대편 산비탈엔 나무들이 울창해 목욕을 마치고 그늘 속에서 낮잠을 잘 수도 있었다. 한적한 위치였고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기에 여자아이들이 없으면 알몸으로 목욕을 하기도 했다. 우리들의 여름방학 놀이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가끔 심심해지면 윗마을의 더 깊고 넓은 소를 찾아가거나 아니면 땡볕의 국도를 30여 분을 걸어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곳엔 수영복과 수경까지 입고 쓴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여름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게 고역이었다.
대관령 벗어나 중3 첫 해수욕
라면 먹고 텐트 치던 추억 생생
한 친구는 그날 왜 화났던 걸까
그 소의 이름은 없었다. 그냥 흔한 쿵쿵소라고 하자. 매일 같이 쿵쿵소에 모인 우리들은 대관령 너머의 경포 바다를 꿈꿨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팬티를 입은 채 바위 위에 엎드려 소문으로만 들은 바다 이야기를 했다. 소금처럼 짜서 마실 수 없다는 바닷물. 멈추지 않는 파도. 운동장보다 넓은 백사장. 발가락으로 잡는다는 조개. 바다에선 목욕이라 하지 않고 해수욕이라 부른다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바닷물은 민물과 달리 몸이 잘 떠서 오리바위, 십리바위까지 어렵지 않게 헤엄쳐 갈 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10리면 4㎞인데 헤엄을 쳐서 간다고? 믿기지 않은 게 많은데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어서 빨리 중학생이 되어 함께 캠핑을 가는 날이 오길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빌린 텐트를 등에 지고 바다를 향해 캠핑을 떠난 건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한 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업은 채 대관령을 넘었다. 아쉽게도 경포해수욕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친구의 큰누나가 살고 있는 주문진 소돌해수욕장이 1차 목적지였다. 여러 면에서 편리하다는 친구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강릉에서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찾아간 해수욕장에서 우리는 엄마 같은 친구 누나의 환대 속에서 텐트를 치고 꿈에 그리던 해수욕을 했다. 백사장은 뜨거웠고 과연 바닷물은 짭짤했다. 자동차 바퀴에 넣는 튜브가 있어 바닷물이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다. 지치면 모래찜질을 했고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밤바다의 수평선쯤에 일렬로 떠 있는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은 우리가 코를 골며 잠들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바다를 헤엄치는 꿈을 꾸었던가….
다음날 우리는 강릉역에서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삼척으로 출발했다. 삼척 못미처 자리한 후진(後津)해수욕장으로 가기 위해서. 캄캄한 기찻굴을 빠져나오면 바다였고 다시 요란한 기적 소리와 함께 기찻굴로 들어가면 열어놓은 창으로 매캐한 연기가 들어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마셨다. 통로에는 각종 생선을 담아놓은 고무 구박(바가지)이 비린내를 풍기며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허리에 전대를 찬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딱딱한 등받이에 기대 입을 벌린 채 잠을 잤다. 천장의 선풍기가 갈매기처럼 끼룩거리며 돌아가던 그 기차는 정차하지 않는 역이 없었고 그때마다 손님들이 내리고 탔다. 점심 무렵 기찻길 옆에 헛간 같은 정류장 건물이 있는 후진역으로 한 명씩 뛰어내렸다. 우리들의 여름은 아직 한창이었다.
솔숲에 텐트를 치고 나니 배가 고팠다. 당시의 텐트는 치는 게 복잡하고 힘이 들었다. 우리는 일단 라면을 끓여 먹고 바다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한 친구의 말과 표정이 이상했다. 텐트를 치는 도중에 뭔가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에도 주변을 맴돌기만 했고 먹으러 오라고 불러도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세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면발을 모두 삼키고 국물을 뜨려 할 때였다. 코펠 냄비의 바닥에 백사장의 모래가 한 줌 정도 가라앉아 있는 게 아닌가! 화가 치솟은 우리는 젓가락을 내던지고 바다를 보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 모래에 대해 물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그냥 넣었다고 답했다. 백사장에서, 솔밭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 말싸움이 오래 벌어졌다. 그날 결국 우리는 텐트를 걷고 강릉으로 가는 비둘기호를 다시 탔다. 각자 떨어져 앉았다. 그렇게 여름 바다와 이별한 뒤 완행버스를 타고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돌아 집으로 왔다.
여름은 아직 남았는데 우리는 더 이상 쿵쿵소에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어른이 되는 동안 쿵쿵소도 사라졌다. 여름이 오면 가끔 생각난다. 그 친구는 그날 왜 마음이 상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