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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대북 억지력이 대화 쿠폰인가

중앙일보

2025.07.29 08:22 2025.07.2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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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
11년 전 런던에서 일군의 활동가를 만났다. BBC가 한국어방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이다. BBC 저널리스트 댄 데이먼을 포함해서였다.

그해 3월 이들이 만든 ‘비공식 BBC 한국어방송’의 시험방송도 있었다. 몇몇 탈북민을 포함한 출연진은 축구 얘기부터 했다(영국이었다). 첼시·아스널·리버풀·볼턴·선덜랜드…. 줄줄이 튀어나왔다. “김정은도 응원하는 팀이 있을까”라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없어요”라고 외쳤다. 어설펐으나 열정적이었다.

데이먼은 “BBC는 과거에도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지 않는 국가와 사회에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이번에 (시험방송으로) 아이디어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옛소련 체제 동유럽을 오래 취재했다.

미국 이어 국정원 대북방송도 중단
이젠 한·미 연합훈련 축소도 거론
협상하기 전에 협상카드 다 내주나
당시 BBC는 난색이었다. 시청료가 2010년 이래 동결된 터라(이전엔 매년 올랐다) 재정적으로 여의치 않다고 했다. 대신 의회가 뛰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상원의원 데이비드 알턴 경이 의회 내 그룹을 만들었다. 한국어 방송도 그의 제안이었다.

그래도 설마 했다. 하지만 2년 반 뒤 BBC가 외국어 방송을 확대하며 한국어도 넣었다. 북한의 밤 시간대에 30분짜리 뉴스를 단파·중파 라디오로 송출했다. 영국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알턴 경은 이런 말을 남겼다. “북한에선 외국 언론에 대한 접근이 금지돼 있고, 접근만으로도 야만적으로 처벌된다. 오늘 BBC와 영국 정부는 북한 정부의 검열과 탄압에 맞서 입장을 밝혔다. 이제 자유로운 발언, 객관적인 뉴스, 외부 세계의 목소리가 북한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전달될 것이다.”

BBC 얘기가 떠오른 건 국가정보원이 대북방송 송출을 중단해서다.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인 38노스가 “조선노동당 선전선동 담당자들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을 수 있다”고 평가했는데 그럴 만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정동영 신임 통일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올 초 북한 주민들은 밤 11시면 11개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25개 주파수 방송 중 일부라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다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미국의 소리(VOA)’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송출이 중단된 데 이어 국정원이 운영하던 4개 라디오도 중단됐다. 이젠 5개 방송에서 6개 주파수만 있다. 38노스가 “북한의 승리”라고 한 이유다.

24시간 기준으로 BBC 외엔 KBS와 우리 국방부, 미국 기금 지원을 받는 민간방송 3곳 정도 남았다. 지금 봐선 우리 쪽도, 미국 쪽도 사정이 애매할 수 있다. 북한 주민이 처벌을 감수하면서도 들었던 목소리들이 최악의 경우 BBC만 남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청한 한 외교통은 “대화를 위한 신호를 던지기 위해 북한 주민들에겐 참 못할 짓을 했다”고 했다. 동감한다.

이재명 정부가 북한에 내어주는 게 대북방송만은 아니다. 과거라면 대화해도 줄까 말까 하던 것들을 미리부터 주고 있다. 대북 확성기나 대북 전단 금지는 논란이라도 있었다. 대북방송은 별 얘기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심지어 김여정이 뭐라니 통일부 장관이 한·미 연합훈련 축소·연기론까지 꺼내며 “대통령실에 건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여정 하명법 논란이 일었던 2020년 대북전단금지법 때의 반복이지만, 한·미 연합훈련은 훨씬 더 심각한 사안이다. 트럼프 1기 때 김정은이 북·미 회담장에 나오면서 강하게 요구했고, 트럼프가 덜컥 받아들여 당시 미군 수뇌부가 발칵 뒤집혔었다. 존 볼턴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에서 “유화적인 문재인 정부도 한·미 연합훈련 축소에 대해선 매우 우려했다”고 적었다. 당시엔 그래도 협상하는 동안이었는데 이번엔 협상 전망조차 없는데 축소·연기다.

북한과 잘 지내길 바라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드를 다 내리면 안 때릴 거라고 믿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미리 다 내어주면 다음엔 뭘 더 내어주려고 하나. 대북 억지력이 대화 쿠폰은 아니지 않나.



고정애([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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