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천에 사는 권모(49)씨에게 올해 여름은 유독 힘겹다. 지난해 말 남편과 사별하고 6살 딸과 함께 사는 그는 '극한 폭염' 속에 아이 걱정이 제일 크다고 했다. "유치원에 가면 그나마 나은데, 집에 오면 뜨거워서 힘들 것"이라면서다.
충남 아파트에 살던 권씨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지난해 이곳 다세대주택으로 이사 왔다. 하지만 다세대주택이 빽빽하게 밀집된 구조상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미니 선풍기 2개에 의지해 지난달 말부터 이어진 폭염을 견뎠다.
설상가상으로 반지하에 가까운 방이라 곰팡이도 많이 슨다. 권씨는 "습기가 많아서 더운데도 보일러를 틀어야 그나마 곰팡이가 덜하다"고 했다. 열악한 주거 조건이 이들의 더위를 부채질하는 셈이다.
한반도를 덮친 여름은 기후변화를 타고 길어지고, 강해진다. 그럴수록 고령자·영유아·기초수급자 등 폭염 취약계층의 '기후 격차'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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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폭염에 기후 격차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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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도 '사치'
누군가 24시간 펑펑 돌리는 에어컨은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서울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층의 에어컨 보급률은 가구당 0.18대(2019년 서울 거주자)다. 전국 평균인 0.97대(2019년 전력거래소 조사)와 비교하면 약 5분의 1 수준이다. 그나마 있는 선풍기 등 냉방기기도 전기요금 걱정에 마음껏 쓰기 어렵다.
열사병 등 온열질환 발생 양상도 기후 격차를 보여준다. 올해 온열질환자 2631명(5월 15일~7월 28일)을 직업별로 나누면 단순노무종사자(26.6
%
)와 무직(13.8
%
)이 제일 두드러진다. 사무종사자(2.2
%
)나 관리자(1.1
%
)와 차이가 크다. 또한 실외가 아니라 집에 머무르다 온열질환에 걸리는 경우도 5.5
%
로 적지 않다.
특히 성인보다 건강에 취약한 아동이 있는 가구는 반복되는 폭염·폭우에 생존권까지 위협받는다. 환경재단이 지난해 저소득 가정 101곳 아동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4명 중 3명(74.3
%
)이 기후위기로 인한 주거환경 변화를 체감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환경 변화로는 폭염·한파(59.4
%
), 해충 증가(33.7
%
), 폭우에 따른 침수와 곰팡이 등 유해 환경 증가(27.7
%
) 등이 꼽혔다.
초록우산은 전문가 17명을 조사한 보고서(2023년)를 통해 "(폭염 등 기후위기가) 질병 위험 증가, 주거 환경 파괴, 불안·무력감 발생 등으로 아동의 생존권을 위협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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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빈곤에 아동 폭염 피해↑ "아이스팩으로 버텨"
강원도 춘천에서 두 자녀와 함께 사는 장모(53)씨 가정도 주거빈곤 속에 시름하고 있다. 비가 와도, 날이 더워도 걱정이다. 30년 넘은 단독주택은 여름만 되면 해충이 들끓는다. 창문이 깨졌는데 100만원 넘는 수리비가 없어 방치하고 있다. 장씨는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곧바로 집안에 내리친다"고 했다.
몸이 좋지 않은 장씨는 별다른 소득이 없다. 그래서 전기료도 몇 달째 밀렸다고 한다. 그나마 단전은 피했지만 2개뿐인 선풍기 쓰기도 버겁다. 그는 "밤에는 물병이나 아이스팩을 얼린 뒤 깔고 자면서 버틴다"면서 "너무 더우면 중1 막내딸은 에어컨 틀어주는 버스 정류장에 일부러 머무르다 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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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아동센터도 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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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트니 집보다 좋아해"
취약층 아이들의 보호·교육 등을 맡는 지역아동센터도 폭염을 피하려는 발길에 덩달아 바빠진다. 서울의 한 지역아동센터 관계자는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이 아침부터 얼굴이 벌게져서 센터에 오는 걸 보면 마음이 안 좋다"고 말했다.
혼자 초등 1·3학년 아들을 키우는 엄마 A씨(47)는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을 흐렸다. 아이들은 저녁까지 집 근처 지역아동센터에 머무르는 날이 많다. A씨가 온전히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데다, 집엔 선풍기·아이스팩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열대야가 너무 심해서 선풍기 바람도, 샤워할 물도 미지근하니 아이들이 잠을 제대로 못 잔다. 그나마 센터에선 에어컨을 틀어주니 아이들이 집보다 센터에 있고 싶어한다"면서 "매년 이렇게 더워지면 걱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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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바우처 등도 사각 "주거·인프라 개선 병행"
정부는 에너지 바우처와 저소득층 에너지 효율 개선, 독거노인 응급안전안심서비스 같은 취약층 보호 제도를 운영한다. 특히 에너지바우처는 저소득 영유아·소년소녀·한부모 가정 등에 냉·난방비를 최대 약 70만원까지 차등 지원하는 제도로 여름나기에 중요하다.
하지만 사각지대는 있다. 권씨는 "남편 떠나고 파출부 하면서 겨우 생계를 꾸리지만, 정부에서 특별히 지원받은 게 없다"며 "에너지 바우처가 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장씨도 "에너지 바우처 대상이지만 요금 체납 때문에 지원을 못 받는다고 들었다"고 했다.
김민정 초록우산 복지사업본부 팀장은 "열악한 주거 환경에 거주하는 아동은 무더위에 훨씬 취약하고, 신체·정서상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쪽방·반지하에 냉방 설비를 설치하는 등 주거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공공쉼터 확충 같은 실질적인 인프라 지원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병철 국회예산정책처 분석관은 지난 2월 보고서를 통해 "지자체 주도로 지역별 맞춤형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사업 방안 마련 등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