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여정은 지난 28일과 29일 각각 한국과 미국을 향해 메시지를 발신했다. 그가 자신의 명의로 담화를 발표한 건 지난 4월 8일 이후 111일 만이다.
4월 담화 제목은 “미·일·한의 시대착오적인 (북한) 비핵화 집념은 우리 국가의 지위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였다. 그런데 28일은 “조한(남북)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미국에는 “조미(북미) 사이의 접촉은 미국의 희망일 뿐”이라고 했다. 4월 담화가 한·미·일의 비핵화 노력에 대한 견제였다면, 이번에는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북·미 관계를 손절하고, 스스로 고립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란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을 향해 동시다발로 내놓은 김여정의 이번 담화는 여러 측면에서 궁금증을 낳는다.
북, 28·29일 연이어 담화 발표
한·미 향해 동시 메시지 발신
이재명 정부 출범 50여 일 만에
판 흔들기로 주도권 확보 시도
① 생뚱맞은 시점? 김여정은 통상 한국이나 미국의 대북 제안에 대응하거나 뭔가 불만을 드러낼 때 담화를 내곤 했다. 지난 4월 담화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외교장관 회의 때 한·미·일 외교 장관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공약을 재확인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이나 미국의 대북 공개 제안이나 사건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난 21일 출범 50일을 맞은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을 지켜본 뒤 뭔가 할 말이 생겼다는 것일 수 있다. 이재명 정부는 “평화가 경제”라며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부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대북확성기 방송과 민간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를 중단토록 했다. 국가정보원이 50년 넘게 해 왔던 대북 심리전 방송도 멈췄다. 북한이 꺼리던 대북 심리전을 선제적으로 중지하며 대화 여건 조성에 나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북한에 대해선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트럼프가 제시한 관세 협상의 시한(31일)을 앞두고 북한이 입장을 낸 것도 눈길을 끈다. 북한은 스스로 이제 ‘북·미의 시간’일 수 있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김여정은 지난해 22차례의 담화를 내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반면 올해는 이번을 포함해 4차례의 담화가 전부다. 사실상 침묵 속에 한국과 미국의 새 정부가 추구하는 대북정책을 지켜봐 오다가 대화든 대결이든 행동에 나선 듯하다.
② “손절한다”며 조건 제시? 김여정은 2022년 8월 한국을 향해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게 간절한 소원”이라고 했다. 남북이 신경을 끊고, 상관하지 말고 살자는 것이었다. 나아가 김정은은 2023년 말 남북관계를 ‘교전중인 적대관계’로 규정했다. 이후 북한은 한국을 ‘주적’으로 삼고, 동족이 아닌 두 국가로 여긴다. 그동안 금기시했던 ‘대한민국’이나 ‘한국’이라는 표현을 공식 사용하고, 노동당의 통일전선부를 비롯해 남북관계 업무를 해 왔던 조직을 없앴다. 남북을 잇는 철도와 도로를 폭파하는 ‘시위’도 했다. 북한은 모든 남북 통신선을 끊었고, 심지어 한국이 구조한 자국 어민의 송환 제안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던 북한이 담화를 발표한 것 자체가 일종의 변화일 수 있다. “한번은 명백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는 김여정의 언급대로라면 이번 담화가 마지막일 수 있다. 하지만 김여정 담화 곳곳에 ‘조건이 갖춰지면’이라는 미련이 녹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1568자에 달하는 김여정의 대남 담화에서 대북전단 살포 중단 등 이재명 정부의 조치를 “평가받을 만한 일이 못 된다”고 한 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 “한미동맹에 대한 맹신과 우리와의 대결 기도는 선임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도 ‘선임자와 달라져야 한다’는 주문일 수 있다.
특히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의 연속적인 강행으로 초연이 걷힐 날이 없을 것”이라는 언급은 ‘한·미 연합훈련 중단 요구’를 내비치는 것일 수 있다. 미국을 향한 담화 역시 제목은 “북·미 접촉은 (미국의) 희망일 뿐”이라고 하고서도, “(북한의 핵능력)인정은 앞으로의 모든 것을 예측하고 사고해 보는 데 전제가 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현 국가적 지위를 수호함에 있어 어떤 선택안에도 열려 있다”거나 “(김정은과 트럼프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 것도 ‘핵을 가진 자신들의 입장을 고려해 달라’는 조건이 행간에 녹아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과거에 집착한다면”이라는 조건절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손절’이 아닌 조건 제시일 수도 있는 것이다.
③ 높아진 허들? 김정은은 집권 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자신이 추진했던 ‘단번도약’을 위해 대북 제재 해제와 미국의 도움이 절실해서다. 그러나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자 북한은 전략 수정에 나섰다. 미국과의 관계를 ‘장기전’으로 미루고, 북·미 회담의 훈수를 뒀던 중국과도 거리를 뒀다. 대신 러시아에 올인하며 뒷배를 단단히 다졌다. 북·러 밀착으로 대북 제재를 무력화하고,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무기 판매와 파병을 통해 경제적 이득도 챙겼다.
북한은 최근 한동안 소원했던 중국과 관계 개선에도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에 대비해 언제든 방향을 중국으로 틀 수 있다는 신호다.
뒷배를 다졌다는 판단에서인지 한·미를 향한 김여정의 담화는 허들을 대폭 높였다. 미국이 민생 관련 대북 제재를 해제해주면 영변 핵단지를 불능화하겠다는 게 하노이에서의 입장이었지만 이젠 비핵화를 논의하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이를 용인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북한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여정의 담화에 백악관도 “북한 비핵화를 위한 대화는 언제나 열려 있다”고 반응했다. 그럼에도 북한이 강한 입장표명에 나선 건 한반도에서 판 흔들기를 통해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차원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가 시간에 쫓겨 북한의 무리한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 급하게 먹은 떡은 체하는 법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 막바지였던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 종식 등을 합의했다가 정권 교체 뒤 유야무야된 일도 있다. 무엇보다 여론 수렴과 국민 공감대 조성이 긴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