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2000년대 초중반 국내에선 차베스 열풍이 불었고 국가자본주의를 내건 베네수엘라를 향한 왠지 모를 선망이 유행처럼 번졌다. 차베스는 장기 독재를 이어갔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을 말한다. 당시 우리는 언론계, 학계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를 배우자는 이론과 주장이 잇따랐다. 인류가 꿈꿔온 지상낙원을 눈앞에 구현할 살아있는 실험으로서 베네수엘라의 발걸음을 주목했다. 당시 차베스는 핑크 타이드(남미 좌파 물결)의 선봉에서 서구 신자유주의와 미 제국주의에 분연히 맞서는 애민(愛民)의 선지자로 묘사됐다.
이 세계가 돌아가는 수준 높은 원리를 알 리 없는, 필자 같은 다수 대중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전통대로 선비들의 이 고매한 가르침을 새겨들었다. 책상 앞에서 고뇌만 해도 세상 이치를 꿰뚫는 분들이 말씀하실 땐 비판의식 같은 걸 가져선 안 된다. 당시에 일부 언론에서 앞장서 소개한 내용을 보며 베네수엘라를 본받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한 신문은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길을 묻자'는 제목의 특집 대담을 실었다. '차베스에게 묻자'는 아니었으나 베네수엘라의 도전을 지향할 길로 봤다. 공영방송에선 베네수엘라의 반미 민중사회주의 실험을 조명하는 특집 프로그램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차베스의 도전'을 방영했다. 일단의 전문가들은 '차베스, 미국과 맞짱 뜨다'란 제목의 책도 펴냈다.
전망은 마음대로지만 모든 건 결과가 입증한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남미 최고 복지국가였던 지상낙원의 현주소는 어떨까. 현재 베네수엘라는 국민 4명 중 3명 넘는 비율로 극빈층이 됐다. 산업 붕괴와 초인플레이션에 따른 빈곤, 치안 부재, 범죄율 상승에 고통받는 건 물론 최소 인권도 보장받기 힘든 나라로 몰락했다. 언론 자유나 여권 등은 사치스러운 단어가 됐다. 실업률 급증으로 붕괴 가정, 해외 취업, 이산가족이 늘고 적지 않은 여성들이 국경 지역에서 성매매로 생계를 잇는다는 가슴 아픈 보도가 잇따른다. 남미에서 가장 빨리 발전했던 베네수엘라의 경쟁력은 이제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인플레이션 상승률은 1만%를 넘긴 해가 있을 만큼 살인적이다. 공식 통화 볼리바르는 휴지 조각 취급받는다고 한다.
사실 베네수엘라는 일부러 망하려 해도 이렇게 되긴 어려운 나라다. 부국의 상징인 석유 매장량이 단위면적당 세계 1위여서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중동 국가들이 척박한 환경과 빈약한 기술에도 부자인 이유가 석유 덕이란 건 유치원생도 안다. 이념 성향에 따라 분석이 엇갈리나 베네수엘라 추락은 여러 요인이 복합 작용한 걸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우선 미국에서 일어난 셰일 가스 혁명이 도화선이 됐다. 이후 국제 유가가 폭락했고 베네수엘라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석유 자급을 넘어 수출도 가능해진 미국이 베네수엘라산 원유 수입을 거의 끊는 악재까지 겹쳤다.
하지만 유가 폭락 하나로 베네수엘라의 비극을 설명할 순 없다. 다른 산유국은 건재하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의 원유 수입 중단에는 차베스의 노골적인 반미 노선과 석유 산업 국유화도 영향을 미쳤다. 채굴 및 정유 회사 국유화로 미국 등 선진 자본과 기술이 빠져나가면서 유질이 떨어지자 수출길이 더 막혔다. 차베스와 그 후계자인 마두로 정권이 반미를 넘어 친중국 정책을 펼치고 부정선거 혐의도 국제사회에서 사실로 인식되면서 미국과 우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까지 받게 된다. 베네수엘라는 지금도 중국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남미 거점 중 하나다.
더 큰 문제는 정권의 대표 브랜드인 무상복지 및 현금성 정책에 드는 천문학적 재원이 원유 수출에 의존했다는 점이었다. 곳간은 비었는데 나가는 돈은 그대로이니 당연히 재정이 바닥났다. 이를 채권 발행 등을 통해 빚으로 메우니 통화 가치가 급락했고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이어졌다. 당시 주요 기관들은 베네수엘라가 석유 수출 수익을 산업 및 기업 재투자 대신 포퓰리즘 정책에 투입해 제조·유통 기반이 붕괴한 점을 결정적 실기로 지적했다. 한때 세계 5대 부국이던 아르헨티나가 후안 페론 집권 이후 '남미병'의 대명사가 됐듯 베네수엘라도 그 전철을 밟은 셈이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이제 회복 불가할 지경에 이르렀다. 역사를 돌아보면 정책 실패에 따른 피해와 고통은 원래 정책 입안자와 집행자가 감수하지 않는다. 다수가 극빈층이 된 베네수엘라처럼, 언제나 괴로움은 지배층의 달콤한 말에 속았던 민중의 몫이었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은 좌우를 막론하고 감언이설을 하는 존재이니, 약자인 일반 국민이 비극을 막으려면 민도, 즉 의식 수준을 높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여기서 퀴즈 하나. 선진 복지국가 중 하나인 스위스에서는 지난 2016년 모든 국민에 월 300만 원가량 기본소득을 주는 법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힌트는 한쪽의 압승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필자 같으면 받고 싶긴 한데, 정답은 독자들이 각자 찾아보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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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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