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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집념으로 상호방위조약 탄생…한·미 모두 윈윈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 ⑭]

중앙일보

2025.07.31 13:00 2025.07.3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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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⑭ '안정의 울타리' 한미동맹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열린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 뒤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조인식을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1950년 6월 24일 자정(워싱턴 현지시간) 장면 주미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북한의 남침 9시간 후였다. “무기가 부족하다. 미국에 긴급지원을 요청해라.” 25일 새벽 1시 장 대사는 한표욱 서기관을 대동하고 국무부로 러스크 동아태차관보를 찾아갔다. 러스크는 “유엔 안보리에 들고 가야겠다”고만 하고 무기는 약속하지 않았다.

다음 날 정오 이승만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위급하다. 즉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무슨 무기라도 달라고 해라” 3시간 후 장 대사 일행은 눈물을 글썽이며 백악관에서 트루먼을 만났다. 트루먼은 미국 독립전쟁과 1·2차 대전에서 유럽과 미국이 서로 도왔던 일들만 거론하며 위로했다. 그러나 무기는 약속하지 않았다. 배석한 애치슨 국무장관이 “유엔 결의를 전폭 지지한다”는 메모를 건넸을 뿐이다. 전날 저녁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군 철수 촉구 결의안이 채택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 미국은 1200만 명이던 병력을 160만 명으로 축소할 만큼 2차대전의 피로가 컸다. 트루먼은 유엔을 내세워 국내의 전쟁반대 기류를 극복하려 했다. 다음 날 아침 장 대사는 미국의 해·공군 지원 결정을 통보받았다. 또 눈물을 흘렸다. 이날 저녁 10시 45분 유엔 안보리는 “회원국들이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청한다”는 결의안(83호)을 채택했다. 이어 7월 7일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사령부의 창설을 결의했다. 당시 소련은 중국 국민당의 유엔대표권 행사에 항의해 안보리 참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역사의 요행이었다.

주한미군 전력
북한의 남침에서 유엔 원조 결의까지 80시간이 걸렸다. 한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걸려있던 순간이자, 2차대전 후 공산세력 팽창과 일본 재무장을 함께 억제함으로써 동북아 평화와 안정의 핵심축이 되어온 한미동맹이 사실상 잉태되는 시간이었다.

전쟁이 교착에 빠지자 1951년 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휴전을 제안했다. 유엔군도 종전 욕구가 컸지만 한국은 사정이 달랐다. 재침 능력을 가진 공산군을 둔 채 휴전하고 유엔군이 떠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은 ‘자살을 강요하는 행위’라며 반대했다. 2년에 걸쳐 휴전협상과 전쟁이 지속되는 사이 미국은 일본·호주·뉴질랜드·필리핀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태평양 방어선을 구축했다. 한국은 그 바깥이었다.

1952년 11월 ‘한국전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반도 중립화’까지 거론했다. 휴전협상은 한국의 안전보장 없이 막바지로 치달았다.

휴전의 마지막 난제는 ‘포로 교환’이었다. 공산 측은 이념전쟁의 명분을 유지하고자 포로 전원 송환을 휴전 조건으로 걸었다. 반면 유엔군 측은 포로들의 자유 의사에 따른 선택을 주장했다. 휴전을 반대하던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자정부터 2만7000명의 반공포로를 유엔군도 모르게 석방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 대해 “적을 하나 더 얻었다”고 경악하면서도 “깊고 진실된 느낌을 받았다”고 반응했다.

미국, 휴전 반대 이승만 하야 계획도
2018년 10월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매티스 미 국방장관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 원문이 담긴 액자를 선물 받았다. [연합뉴스]
사실 이승만의 독단적 결정을 접한 미국은 이승만의 하야 계획(에버레디 작전)까지 세웠다가 결국 포기했다. 오히려 이승만은 미국 측에 “일본 등과 맺은 안보조약 같은 것을 한국에도 제공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휴전이 급했던 미국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7월 12일 한·미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보름 후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1953년 10월 서명한 상호방위 조약은 이듬해 11월 발효됐다. 이승만의 고집과 결단이 쟁취한 안보와 번영의 울타리였다.

조약 서명 후 이승만은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예언은 입증됐다. 당시 미국은 한국을 정치·군사·경제적 부담으로 여겼다. 그러나 한국은 2차대전 이후의 성공사례로 등장했다. 한미동맹은 자유민주질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전체주의 세력의 도전을 견제하는 중요한 장치가 돼 왔다. 미국도 혜택을 많이 봤다.

이승만은 상호방위조약과 함께 미국의 경제·군사 지원을 담은 합의의사록을 체결해 동맹의 실체를 구비했다. 미국은 1955년에만 7억 달러 규모의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했다.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3년 치 규모였다. 10개 예비사단, 79척의 해군 함정, 111대 항공기를 확보함으로써 한국군은 체제를 갖추고 경제재건에 착수할 수 있었다.

동맹을 맺은 지 72년이 지났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한국을 안보공약의 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국내 일각에서도 미군을 한국의 군사·사법 주권을 침해하는 점령군으로 본다. 객관적 사실은 미군은 한국의 초청으로 와 있고, 언제든지 한국이 원치 않으면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그 규모와 구성이 조정되고 변해왔다. “아시아 방어는 아시아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으로 1971년 주한미군 6만 명 중 2만 명이 감축됐다. 1977년에는 카터 대통령이 전면철수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냉전 종식과 함께 1990년대 초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으로 추가 감축돼 지금은 2만8000명이 주둔한다. 미군기지가 후방 평택으로 통합되면서 방위의 주된 책임은 한국이 담당한다.

한미 군사동맹은 4개 체계에 따라 운용된다. 작전통제와 연합방위체계, 군대의 지위에 관한 법적체계(SOFA), 방위비 분담체계, 무기 체계다. 작전통제권은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에 이양했다가 1978년 한미 연합사령관에게 이관됐다. 2000년대 들어와 동맹의 운용을 ‘미군 주도-한국군 보조’에서 ‘한국군 주도-미군 보조’로의 전환이 진행 중이다.

전작권 협상은 정치보다 군사문제
지난해 10월 한미동맹 71주년 기념 부산대회에 참석한 해외 참전용사. 송봉근 기자
2006년 부시 행정부는 한국의 능력을 감안할 때, 늦어도 2009년까지는 작전권을 원활히 전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이 “3년만 늦추자”고 하자 당시 해들리 국가안보 보좌관은 “3년이란 시간이 무한정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면서 부시 재임 중에 전환을 완수할 것을 요청했다. 작전권 전환은 미국에서도 군부를 포함한 여러 부문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결단한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반미감정의 핵심요인이던 미군지위협정(SOFA)는 1991, 2001년 두 차례 개정을 통해 일본, 독일의 SOFA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2차 개정협상 당시 한국 측은 “SOFA가 거실의 소파처럼 주인과 손님 모두에게 편안해야 한다”면서 미국 측과 국내 반미론자들을 함께 설득했다. 방위비 분담은 점진적으로 증액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운용돼 왔다. 기본원칙은 ‘현지발생’ 비용을 접수국이 부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군사작전 비용까지 거론함으로써 동맹의 난관으로 등장하고 있다.

무기체계는 한국의 장비가 미국의 체계와 호환성을 갖도록 운용된다. 한국은 지난 10년 기준으로 미국 무기의 3대 수입국이다. 현재 트럼프는 동맹국의 국방비를 5%까지 증액하라고 요구한다.

북한의 도발 억제와 아시아태평양의 안정유지를 목표로 하는 한미동맹은 평화와 번영이라는 과실을 공유해 왔다. 미국에게도 성공한 동맹의 모범 사례가 됐다. 한미동맹은 미래에도 양국 모두에게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이 해외 군사 역할과 재정부담을 급속히 축소코자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동맹의 무게를 대북 억지보다 대중 견제에 둔다는 것이다. 비용은 타협의 여지가 있지만 목표는 그 여지가 좁다.

왕도는 없다. 동맹을 시대적 요청에 맞춰야 한다. 첫째, 주한미군 운용을 대만해협까지는 넓히려는 소위 ‘전략적 유연성’을 존중하면서, 미군의 현지비용은 한국이 부담하고 선박·항공기 유지보수 등 군수 분야의 호혜적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둘째, 한국이 ‘의존형 동맹’에서 ‘자립형 동맹’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위험과 부담을 축소하려는 미국의 필요와 국가의 자율성을 증대시키려는 한국의 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다. 핵심은 전적으로 ‘군사적 판단’에 따라 전작권을 전환하고 ‘잠재적 핵’의 요체인 우라늄 농축 능력을 확보하는 문제다. 이념과 정파가 끼어들면 국가안보는 위험해진다.

※다음은 ‘반도체 신화의 탄생 ’편입니다.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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