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바위에 붙은 따개비를 닮아 ‘따개비 마을’이라 불렸다. 300년 넘는 세월 동안 고요하고 정겨움 가득하던 어촌 마을에 지난 3월 화마가 덮쳤다.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이곳 영덕군 석리 마을까지 다다라, 가옥 84채 중 78채를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다. 고령의 주민들은 배에 몸을 싣고 바다로 피신했다. 불이 너무 빨리 번진 탓에 변변한 짐도 챙길 수 없었다. 산불 직후, 잿더미만 남은 마을의 모습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로부터 120여 일이 흐른 지금, 주민들은 임시 대피소를 벗어나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재로 뒤덮였던 마을은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에서 다시 ‘살아가는 곳’이 되기 위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을 이장 이미상 씨(64)는 요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다. 지난 6월 초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왔지만, 생필품은 물론 생계 기반 하나하나를 다시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임시 숙소만으로는 지내는 데 부족한 게 많아요. 에어컨이 있어도 안이 너무 답답하고 더워서 어르신들이 견디기 힘들거든요.” 마을 주민 평균 연령이 75세 이상 고령이라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래서 컨테이너 사이에 그늘막이라도 설치해 달라고 건의하고 있어요.” 이 이장은 “행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잘 모르는 것 같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 한구석. 김재봉 할아버지(88)는 고추밭에 농약을 뿌리고 있었다. 농약 통을 등에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텃밭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집이) 다 타버렸지만, 텃밭이라도 다시 가꿔야지요.” 석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김 할아버지는 “이렇게 큰불이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며 “지금 생각해도 지옥 같던 날”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김 할아버지의 아내 윤금자 할머니(83)는 당시의 충격으로 안면 마비 증세까지 왔다고 털어놨다. “사람 말이 귀에 안 들어올 정도였어요. 누가 말을 걸어도, 얼굴을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죠.” 그녀는 “서울, 포항 등 전국에서 온 의료진들이 침도 놓고 약도 챙겨줘서 이제는 많이 나아졌다”며 연신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윤 할머니는 장이 서는 날이면 버스를 타고 영덕 시장까지 혼자서 다닐 만큼 건강을 회복한 상태다.
정오 무렵, 마을 임시 노인회관에 하나둘 어르신들이 모여든다. “오셨니껴?” 김영기 노인회장(71)이 반갑게 인사하며 자리를 안내한다. 김 회장은 산불로 마을회관이 불에 타자 자신의 집을 어르신들을 위해 개방했다. 마무리 공사 중인 새 회관은 9월 초 입주 예정이다. 김 회장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 처음엔 서로 말도 못 꺼냈어”라며 당시를 떠올린다. 하루도 빠짐없이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이곳이 마을의 사랑방이 됐다.
식탁에 오르는 반찬은 매일 자식들이 볼 수 있도록 온라인 커뮤니티에 사진을 찍어 올린다. 김 회장은 “엄마, 아빠가 뭘 먹었는지, 식사를 거르지는 않았는지 알 수 있는 연결고리”라며 “식사 후에는 어르신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며 마음을 추스른다”고 말했다.
“두 분은… 끝내 못 나왔어요.” 마을 주민인 요양보호사 김미경 씨는 산불이 나던 날 할머니 네 명과 함께 피난을 시도했다. 하지만 불길이 순식간에 이동 중인 차량까지 덮쳤다. 한 명을 간신히 부축해 차에서 빠져나왔지만, 나머지 세 명은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차는 폭발했고, 그 파편이 눈에 박혀 최근 병원에서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날 이후 차에 갇힌 할머니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요즘도 그녀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눈 뜨면 약을 20분 단위로 자기 전까지 먹어야 해요. 그래도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 덕분에 최근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날이 많아졌어요.”라며 김 씨는 그 날 할머니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고개를 떨궜다.
컨테이너 앞에 앉아 말없이 바깥을 바라보던 이진걸 씨(65). 젊은 시절 사고로 한쪽 손을 다쳐 장애를 얻었다. 생활이 힘들어지자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홀로 지내왔다. 힘겹게 버티던 삶에 이번에는 산불이 덮쳤다. 살던 집과 함께 애지중지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도 사라졌다. “집은 다시 지으면 되고, 오토바이도 다시 살 수 있어요. 근데 부모님 사진은…” 이 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겨를도 없었어요. 불이 너무 빨리 번져서…” 불에 타버린 사진이 이 씨에게는 가장 큰 상실이었다. “이젠 제삿상에 놓을 부모님 사진도 없어요. 사진이 없어지니 추억도 같이 사라진 것 같아서… 너무 아쉽죠.”
다음 날, 이 씨가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났다. 새로 산 애마에 올라 탄 이 씨가 함박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록 집과 함께 사진도 다 타버렸지만, 이제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며.
전정영 할머니(83)는 다행히 집을 잃지 않았다. 운 좋게 화마를 피한 6가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산사태 위험이 있다는 마을 이장의 판단에 따라 임시 숙소에 입주했다. 집은 그대로 있지만, 이재민으로 살아야 하는 복잡한 처지가 됐다. 전 할머니는 평생을 해녀로 살았다. 고된 삶이었지만 자식들도 훌륭하게 잘 자라줬다. 객지로 하나 둘 떠나고 홀로 살던 중 화마가 닥쳤다. “마을 전체를 도시재생사업 한다고 하던데, 그럼 우리 집은 어찌 되는 건지…”, “죽기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 할머니뿐 아니라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고령이다 보니, 금전적 문제는 물론 긴 공사 기간도 부담이다. 언제 새 집을 지어 돌아갈 수 있을지 마을의 숙제가 됐다. 산불로 가옥이 전소된 가구는 지원금을 받았지만, 전 할머니의 경우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날 오후 컨테이너 숙소 앞에 생필품을 가득 실은 봉고차가 도착했다. 베개, 셔츠, 양말 등이 펼쳐지고 어르신들도 하나둘 모였다. “이거 얼마예요?” 전춘자 할머니(82)가 길쭉한 베개를 보며 묻는다. “제가 사드릴게요.” 곁에 있던 손자 이성찬 군이 말했다. 인천에서 혼자 할머니를 찾아온 성찬 군은 주머니 속에서 100원짜리 동전 50개와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그 돈으로 할머니에게 베개와 셔츠를 사 드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르신들 얼굴에 덩달아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베개를 품에 안은 할머니의 표정이 유난히 행복해 보였다.
화마로 입은 상처를 복구하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다. 수리중인 전봇대, 불에 타 밑둥치만 남은 고목, 주인을 기다리는 텅빈 집 터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중이다. 재만 남았던 땅에 다시 고추가 자라고, 텃밭이 일구어지고 있다. 밥을 지어 함께 나누고, 그늘 아래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사람이 돌아왔잖아요.” 마을 어르신의 이 한마디가 지금 석리 마을의 여름을 가장 잘 말해준다. 잿더미 위에서도 사람들은 다시 살아간다. 갑작스러운 산불로 큰 상처를 입었지만, 이제 서로의 체온으로 상처를 치유하며 따개비 마을은 조금씩 회복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