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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가 약! 혈뇨 싹 낫더라" 이성윤 기겁하게 한 연수생 尹

중앙일보

2025.08.02 13:00 2025.08.0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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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기고 퇴장했습니다. 정치 입문 9개월 만인 2022년 3월 9일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에 당선돼 사실상 가장 짧은 시간 만에 민주적 절차를 거쳐 대권을 차지한 대통령이 됐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던 비상계엄을 느닷없이 발동해 스스로 정치 생명을 재촉했다는 점입니다.

임기 시작 1060일만에 탄핵 당한 그는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빨리 뜨고, 가장 빨리 진’ 대통령으로 남게 됐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요. 인간 윤석열의 청년 검사시절의 비화를 공개합니다.

2회 폭탄주와 예의-청년 윤석열의 두 얼굴


윤 전 대통령의 정적 중 한 명인 이성윤 더불어민주당 의원. 연합뉴스
1992년 봄, 개나리가 만발한 서울 서초동 법원 청사 북쪽에 일군의 젊은이가 있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그 공간에 입성한 사법연수원생들이었다. 연수원 23기 타이틀을 부여받고 인생의 가장 찬란한 봄을 만끽하던 그 무리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윤석열 연수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적이 되는 이성윤 연수생도 있었다.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문재인 정권의 편에서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과 사사건건 맞섰고, 이후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대통령이 된 옛 연수원 동기를 매섭게 공격했던 바로 그다.
하지만 연수원 시절에만 해도 두 사람은 친했다. 윤 연수생이 32세, 이 의원이 30세. 늦깎이 연수생들인 두 사람은 동병상련이었다. 게다가 같은 반, 같은 조였다.

당시 사법연수생은 300명 정도였는데 인원이 많아 몇 개의 반으로 나뉘었다. 한 개의 반은 또다시 15~20명으로 묶인 몇 개의 조로 구성돼 있었다. 두 사람은 5반이었고, 그 반에서도 같은 조에 속해 있었다.

그 조에는 두 사람 이외에도 윤석열 정부 네 번째 공직 낙마자가 됐던 송옥렬 전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 윤석열 정부 국가인권위 비상임위원을 역임한 윤석희 변호사 등이 소속돼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고 함께 공부하면서 인생의 봄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성윤 연수생에게는 그들과의 교류 과정에서 매우 힘든 점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것과 관련해 그가 윤 연수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 그거 괜찮아졌어요?”
“뭐?”

이 연수생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그 왜…. 혈뇨(血尿) 말이에요.”

윤 연수생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 그거? 다 나았어.”
“아니 어떻게 나았소? 병원 다녔어요?”

윤 연수생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아니. 역시 술이 약이더라. 폭탄주를 계속 마셨더니 싹 낫더라고. 하하하.”

이 연수생을 괴롭힌 건 바로 폭탄주였다. 그는 기독교인인 데다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조에는 애주가가 많았고, 모였다 하면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다. 그 선두에 섰던 게 윤 연수생이었다.

그는 두주불사의 폭탄주 애호가였다. 이 연수생이 보기에는 그의 혈뇨도 말술로 인해 발생한 증상이었다. 그의 걱정에 대해 윤 연수생이 병인(病因)으로 병을 치료했다는 역발상의 농담성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이성윤 의원의 저서 『그것은 쿠데타였다』에 나오는 일화를 재구성했습니다.)

말술은 다변, 박학다식, 보스 기질 등과 함께 윤 전 대통령을 대변하는 특징으로 지목된다. 물론 그의 애주 성향은 대학 시절부터 일찌감치 형성된 것이지만 연수원에 입소하고 사회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가 잘나갈 때 술은 그의 호탕함과 인간미를 대변해 주는 매개체로 자주 인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판단력 저하와 국가 경영 저해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면서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정치적 고향’ 대구

윤 대통령이 초임 검사로 일했던 대구지검 청사. 중앙포토
윤 전 대통령은 사법시험이나 연수원 성적이 최상위권은 아니었다. 그래서 검사들이 선망하던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하지 못했다. 1994년 3월 그가 네 명의 신임 검사와 함께 검사 경력의 첫발을 내디딘 곳은 대구지검이었다.

대구는 그의 고향이 아니다. 선친의 고향(충남)도 아니다. 하지만 그 도시는 인생의 고비마다 그를 품어줬다. 검사 생활을 시작한 곳이 대구였고, 첫 특수부장 타이틀을 선사한 곳도 대구였다.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과정에서의 외압을 폭로했다가 윗분들을 난감하게 만든 죄로 쫓겨났을 때도 대구(대구고검)는 그를 감싸안았다.

사실상의 정치 입문 선언을 한 곳 역시 대구였다. 2021년 3월 3일 ‘대구고·지검 순시’라는 명목으로 그곳을 찾아 박정희의 재림을 방불케 할 정도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그는 바로 다음 날 사의를 표명한 뒤 정치인이 됐다.

하숙집 주인, 예의 발랐던 ‘윤 검사’를 회고하다

1992년 사법연수원에 입학하기 직전의 윤석열 전 대통령. 사진 국민의힘
그의 타향살이는 어땠을까. 매일신문 2022년 2월 28일자에 권병직(84)·박정자(84)씨 부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들은 윤 전 대통령의 초임 검사 시절 하숙집 주인이었다. 다음은 그들이 회고한 하숙생 시절의 윤 전 대통령이다.

“복덕방에 ‘우리 문간방이 비었는데 자는 사람 한 명만 구해주세요’라고 의뢰했지. 그랬더니 며칠 있다가 이래 막 덩치 큰 사람을 데리고 왔는기라. 검사라고 그러데. 살림살이도 별로 없었다. 바닥엔 이불, 벽엔 정장 한 벌이랑 와이셔츠 정도만 걸려 있었는데 트랜지스터라디오 하나 갖다 놨던 게 기억난다. 아침마다 북엇국을 그렇게 맛있게 먹었어.”

그들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2년 동안 겪었는데 지금 보태는 것도 빼는 것도 없이 인간으로서 가진 덕목은 거진 다 갖춘 사람이었어.”

칭찬 세례는 숨 쉴 틈이 없었다. 특히 윤 검사의 마지막 하숙일은 부부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선생님, 잠깐만 앉아보세요”

윤 검사의 짤막한 말 뒤에 벌어진 일, 하숙집 내외는 아직도 그날의 놀라운 광경을 잊지 못한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라며 간절히 그를 염원했던 부부, 그들의 기억 속 청년 윤석열은 어떻게 남아있었을까.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9391

인간 윤석열을 파헤치다
“야! 휴게소다”“또 들르게요?” 윤석열·한동훈 10시간 부산행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8516

총선 출구조사에 격노한 尹… “그럴 리 없어! 방송 막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6454

“尹 술친구 자랑하던 그 의원, 한동안 찍혀 죽어 지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27709

“변호나 똑바로 해 이 XX야”…법정서 터졌다, 尹 폭언·막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1035

“쇼하지 마쇼” 또 사고 터졌다…尹 검사의 습관성 ‘법정 버럭’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6730

尹, 지지자에 더는 인사 안했다…"XXXX" 욕설만 남은 서초동 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50548

박진석([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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