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당시 민주당이 추진했다가 거부권(재의요구권)에 막혔던 쟁점 법안들이 7월 임시국회를 하루 남긴 4일, 대거 본회의를 통과했다. 두 차례 거부권으로 좌초됐던 방송3법(방송법ㆍ방송문화진흥회법ㆍ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의 일부인 방송법 개정안도 이날 처리 수순에 돌입했다. 방송법 개정안 상정 직후 야당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처리를 일단 막아섰지만, 5일 통과가 확실시된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된 15개의 법안에는 양곡법 개정안, AI 교과서법(초ㆍ중등교육법 개정안), 지역화폐법(지역사랑상품권법 개정안) 등 그간 여야가 대치해온 법안 다수가 포함됐다.
양곡법은 재석 236인 찬성 199인, 반대 15인, 기권 22인으로 가결됐다. 이 법안은 윤석열 정부 때 야당이던 민주당 주도로 본회의 문턱을 넘었지만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다가 이재명 정부 들어 재추진됐다. 기존 법안은 쌀이 기준 가격 미만으로 하락하는 경우 생산자에게 그 차액을 전액 지급하도록 했지만 이날 처리된 수정안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매입하도록 규정됐다. 정부의 정책 재량을 인정한 것이다. 벼가 아닌 작물 재배에 대한 정부 재정 지원을 의무화해 자연스레 쌀 생산량 감축을 유도하는 내용도 추가됐다.
이재명 정부 핵심 정책인 지역사랑상품권을 지원할 지역화폐법도 재석 236인 중 찬성 161인, 반대 61인, 기권 14인으로 통과됐다. 법안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역사랑상품권 지원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역시 지난해 발의됐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이 정부의 예산편성권 침해를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됐었다.
지난달 민주당 주도로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과한 ‘AI 교과서법’은 재석 250인 중 찬성 162인, 반대 87인, 기권 1인으로 가결됐다. 법안은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의 지위를 교과서가 아닌 교육 자료로 격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지영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반대 토론에서 “AI 교과서 지위 격하는 사교육을 못 받는 저소득층 등 아이들의 새로운 경험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주항공 참사의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됐던 활주로 둔덕(로컬라이저) 설치를 차단하는 내용을 담은 공항시설법 개정안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 등도 이날 본회를 통과했다.
여야가 처리에 합의한 법안이 모두 통과되자 우원식 국회의장은 방송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방송법 개정안을 포함한 방송3법 개정안은 민주당이 주장하는 ‘언론개혁’의 핵심 법안이다. ▶한국방송(KBS)의 이사 수를 기존 11명에서 15명으로 ▶문화방송(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와 교육방송(EBS) 이사 수를 각각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고 ▶늘어난 이사 수의 약 40%를 국회가 추천하도록 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나머지 이사의 추천권은 방송사 임직원ㆍ시청자위원회ㆍ언론 관련 학회ㆍ유관 변호사 단체 등에 나눠주겠다는 내용도 있다.
방송 3법 개정안은 그간 야당이 “방송 장악법이자 언론 공정성을 해치는 무도한 입법”이라고 강하게 비판해 온 법안이다. 야당은 국회가 직접 공영방송 이사를 추천하게 한 것부터 문제 삼고 있다. 현재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갖고 있는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을 직접 정치권이 행사하게 되면, 정치 논리에 더 휘둘리게 된다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또 나머지 이사 추천권을 언론 관련 학회와 시청자위원회 등에 주는 것도 여야의 대치 지점이다. 여당은 이런 구조가 정치적 영향력을 줄일 것이라 주장하지만, 국민의힘에선 “친여 성향이 있는 인사나 민주노총 출신 등을 이사로 대거 꽂아넣겠다는 의도 아니겠느냐”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날 상정된 방송법 개정안에서는 특히 지상파ㆍ종합편성채널ㆍ보도전문 채널이 노사 동수로 편성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에 야당은 “언론노조 등 특정 세력이 편성을 지배할 길이 열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공영방송과 보도전문채널에서 보도국장 등 보도책임자를 임명할 때 보도분야 직원 과반수의 동의를 받도록 한 조항에 대해서도 “사실상 특정 노조나 단체의 거부권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독소 조항’으로 꼽는다.
한민수 민주당 의원이 “한국방송공사의 독립성, 정치적 중립성 및 합리적 운영을 보장하기 위한 법안”이라고 제안 설명을 마치자, 국민의힘은 곧바로 필리버스터에 돌입했다.
첫 타자로 나선 신동욱 국민의힘 의원은 “언론개혁, 방송개혁이란 말은 제발 하지 말라”며 “민주당 방송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불러라. 여러분이 원하는 사장을 앉히면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되느냐”고 지적했다. 신 의원은 또 “오늘 정청래 대표님 만나뵈면 악수부터 하려고 했는데 취임 일성이 야당과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며 “여당 대표가 야당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셔서 정말 서운하다”고 날을 세웠다. 정 대표는 신 의원 발언 시작 전에 본회의장을 떠났다.
민주당 의원들은 신 의원 토론 시작 직후 대부분 본회장에서 퇴장했다. 지도부도 곧바로 무제한 토론 종결 동의안을 제출했다. 필리버스터 시작 24시간이 지나면 이 종결 동의안에 대한 무기명 투표가 진행된다. 범여당이 재적 5분의 3(180석) 의석을 확보하고 있어, 5일 오후엔 토론을 강제 종료시킬 수 있고 대상 법안은 자동 상정돼 표결에 부쳐진다. 민주당은 이 방식으로 5일까지 방송법 한 건을 처리하고, 다시 8월 국회를 열어 회기를 잘게 쪼개 매회기마다 쟁점 법안 한 건씩을 처리한다는 ‘살라미 전략’을 세우고 있다. 김병기 원내대표는 이날 의원총회에서 “각개격파할 것”이라며 의원들을 향해 “해외 나가시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여야는 7월 국회를 통과할 단 하나의 쟁점 법안을 무엇으로 할지를 두고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민주당 내에선 기업 반발이 거센 노란봉투법(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2ㆍ3조 개정안)이나 상법 개정안 대신 방송3법을 처리하자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바로 전날(3일)엔 “방송3법은 법안이 세 개라 어차피 한꺼번에 통과가 안 되니 다른 법안으로 하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오전에는 다시 “방송법을 우선 처리할 것”(김현정 민주당 대변인)이란 쪽으로 기울었고, 정청래 민주당 신임대표가 이날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에서 “방송3법 맨 앞에 상정해 처리하겠다”고 쐐기를 박았다.
이같은 결정은 우 의장과 여야 원내대표 오찬을 거치며 굳어졌다. 국회 관계자는 “방송3법ㆍ노란봉투법ㆍ상법 개정안을 올리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상태에서 국민의힘이 고육지책으로 방송법 우선 처리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말했다. 이에 국민의힘 관계자는 중앙일보 통화에서 “노란봉투법과 상법 개정안은 경영계 반발이 거세 일단 시간을 확보해 대안을 만들어보자는 당내 공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