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동네든 1번지의 상징성은 크다. 이름난 동네일수록 1번지에 굵직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는 청와대가 있다. 국회의사당은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롯데백화점 본점은 중구 소공동 1번지가 주소다.
그런데 최근 SNS에서 강남구 청담동 1번지가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 명품거리가 보여주듯 돈과 럭셔리가 집약된 동네다. 청담동 1번지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지난 5월 완공된 새 건물이 문제다.
청담동 1번지는 도산대로, 학동 사거리에 있다. 위치가 워낙 좋아서 매물로 나왔을 때부터 화제였다. 돈 좀 있는 집안 자제들과 여의도 자산운용사들이 탐냈다. 하지만 너무 비싸서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시행사가 이를 덜컥 샀다. 유행하는 고급 주택을 짓겠거니 했는데 다른 이야기를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하이엔드 멤버십 클럽 ‘디아드 청담’을 짓겠다는 거다. 상위 0.1% 자산가만 출입할 수 있는 회원제 건물. 개인 회원권이 10억원이고, 연회비가 1000만원이다. 남산 반얀트리 회원권이 1억원 수준이고 연회비가 600만원 선이다. 디아드 청담은 기존 회원제 클럽이 제공하는 운동·스파 외에 해외 아트페어 구매 대행부터 골프장 예약까지 각종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홍보했다.
그런데 완공된 건물은 홍보한 조감도와 완전히 달랐다. 너무 극단적인 변화라 이를 비교하는 사진이 떠돌았다. 0.1% 자산가용 회원제 클럽이 아니라 최저가에 도전하는 다이소가 입점한 건물 같다는 평이 쏟아졌다. 건물을 본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동네 업자가 지은 근린생활시설(근생) 수준”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동네 업자 건물이 아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72)의 작품이라고 시행사는 떠들썩하게 홍보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페로에게 e메일 인터뷰를 요청했다. 곧장 답이 왔다. 페로는 “내 이름을 빼라고 분명히 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며 지난해 말 시행사에 최후통첩으로 보낸 기밀(confidential) 문서도 첨부했다. 디아드 청담이 왜 망작 논란에 휩싸였는지, 건축가가 밝히는 풀스토리를 최초로 공개한다.
"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분명 내 이름을 빼라고 공표했다. "
페로의 일성이 이랬다. 시행사에 최후통첩으로 보낸 기밀문서까지 공개할 정도니 단단히 열 받은 듯했다.
페로는 상위 0.1% 자산가를 위한 회원제 클럽, 디아드 청담의 건축가였다. 하지만 그의 설계안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페로는 지난해 11월 6일, 건물의 뼈대가 서고 한창 공사가 진행될 때 시행사인 아스터 개발에 ‘디아드 프로젝트에서 도미니크 페로의 저작권 및 서명을 전면 철회해 달라’는 제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런 내용이 담겼다.
“최근 논의에서 명확해진 것은 내가 진심과 열정을 다해 설계한 건축물의 디자인과 품질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올해 초 귀사로부터 본 프로젝트의 경제적 여건이 악화했음을 통보받았으며, 2024년 5월 마지막 방한 당시 지난 2년간 함께 개발해 온 원안 대신 ‘대안 6’로 후퇴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후 몇 달간 외관 재설계를 했다. 극단적으로 미니멀한 전략에 따른 설계로, 디테일의 완성도가 중요했다. 하지만 현재 귀사의 로컬 건축가에 의해 세부 사항 대부분이 이미 확정됐고, 나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된 부분이 많았다.”
공사현장 보고 열 받은 건축가, “내 이름 빼라”
이쯤에서 디아드 청담 관련 세 가지 이미지가 떠도는 게 이해가 된다. 첫 번째 대리석 덩어리로 쌓은 듯한 건물은 페로가 처음 디자인한 안이고, 두 번째는 시행사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해 페로가 축약한 안이었다.
하지만 현재 완공된 안은 한국 건축사무소의 안이다. 페로가 선택한 외관의 천연 대리석은 저렴한 알루미늄 패널로 대체됐다. 페로는 “외부 유리창 구획조차 마치 질 낮은 사무실처럼 잘게 나눠 놨고, 건물의 입체감은 완전히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도미니크 페로는 지난해 5월 공사가 상당히 진행됐을 때 현장을 방문해 둘러보고선 대단히 실망하며 프로젝트에서 빠지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페로의 서신은 날카로웠다. 프로젝트가 길을 잃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페로는 “현재의 마감 방식은 이 나라 엘리트를 위한 프로젝트로서의 품격과 독창성을 반영할 수 없고,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건축물에서 기대되는 품질에도 못 미친다”고 했다. 이어진 최후통첩.
“이 프로젝트는 더는 내것이 아니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프로젝트의 건축가도, 저자도 아니다. 귀하의 쇼룸을 포함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자료에서 내 이름을 즉시 빼달라. 향후 모든 홍보 및 마케팅 자료에서도 언급하지 마라.”
그 이후로 다이소 청담이라고 놀림당하고 있는 현재 형태대로 설계가 변경된 것.
디아드 청담은 세차례 설계 변경을 거쳤다. 흔치 않은 일이다.
시작과 끝이 완전히 다른 이 건물, 어떻게 준공 허가가 났을까. 이렇게 바꿔도 문제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