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당국이 최전방에 설치한 고정형 대북 확성기를 4일부터 전면 철거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윤석열 정부가 북한의 오물풍선 도발에 대응해 확성기를 꺼낸 지 14개월 만으로, 9·19 남북 군사합의를 되살리기 위한 준비작업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국방부는 4일 “우리 군은 오늘부터 대북 확성기 철거를 시작했다”며 “이는 군의 대비태세에 영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남북 간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 조치를 시행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군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번 철거는 최전방 군사분계선(MDL) 가까이에 설치했던 24개의 고정형 대북 확성기가 대상이다. 16개의 이동형 확성기는 지난해 말부터 사실상 운영하지 않았다. 이날부터 수 일에 걸쳐 모든 고정형 확성기를 뗀다는 게 국방부의 설명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북한과의 사전 협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앞선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때처럼 선제적으로 철거를 결정했다는 설명이다. 앞서 이재명 정부는 출범 1주일 만인 6월 11일 오후 2시부로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군 당국은 이때부터 철거도 검토했다고 한다.
다만 북한의 행동 변화 없이 연이은 선제조치를 이어갈 경우 오히려 북한의 ‘대남 길들이기’에 말려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작지 않다. 특히 대북 확성기 방송은 북한의 ‘최고 존엄’을 직접 비판하는 내용으로, 북한 당국이 매우 민감해 하는 대표적인 비군사적 조치로 꼽힌다. 정부가 보유한 얼마 안 되는 실효적 대북 카드인 셈이다.
이와 관련,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달 28일 담화에서 “리(이)재명 정부가 아무리 동족 흉내를 피우며 온갖 정의로운 일을 다하는 것처럼 수선을 떨어도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 인식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며 정부의 조치를 폄훼했다.
정부가 ‘남북 신뢰 조치’를 앞세워 확성기 카드를 먼저 접으면, 향후 북한이 오물풍선 등 다시 도발을 하더라도 이를 다시 꺼낼 명분이 미약해진다는 우려도 그래서 나온다. 이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상황을 예단하지 않겠다”고만 했다.
정부가 속전속결로 확성기 방송 중단→철거를 결정한 건 이 대통령의 공약 사항인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을 되살리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볼 여지도 있다. 앞서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6월 4일 9·19 군사합의의 전부 효력정지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뒤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확성기 방송 설치·재개를 결정했는데, 이재명 정부는 이를 되돌리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을 가능성이다.
정부는 이달로 예정됐던 한·미 을지자유의방패(UFS) 연합연습의 실기동훈련(FTX) 일부를 9월로 연기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런 조치들의 배경으로 이 대통령이 오는 8·15 경축사 등을 통해 전향적인 대북 구상을 내놓기 위한 분위기 조성 차원일 가능성도 거론된다.
김여정의 담화에 호응하듯 ‘한·미 연합연습 조정’ 카드를 띄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날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인 진우 스님을 만나 군 당국의 확성기 철거 조치에 대해 “무너진 신뢰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그런 조치의 하나”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쪽 위원장도 강대강, 선대선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선을 취하면 저쪽도 선으로 응할 거라고 생각된다”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