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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의 시선] 세상만사 ‘기초’가 중요하다

중앙일보

2025.08.05 08:20 2025.08.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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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 스포츠부장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나 물질이 연속적이라고 봤다. 문제는 그럴 경우 열복사(물체가 전자기파를 통해 열에너지를 방출 또는 흡수)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독일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1858~1947)는 “에너지는 불연속적인 단위인 양자(quantum)로 방출된다”고 가정했는데, 문제가 해결됐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플랑크 상수(h)를 제시했다. 전자의 구조와 화학 결합, 반도체 기술, 양자컴퓨터 등 현대 과학기술 전반의 토대가 된 양자이론은 그렇게 태동했다. 또 하나. 그는 당시 특허청 공무원이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쓴 논문의 진가도 알아봤고, 교수로 임용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막스 플랑크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으로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을 꼽는 이유다.

최근 선전하는 한국 수영과 육상
계영·계주서 약진해 더욱 희망적
성과 구조화 통해 문화로 안착을

그의 이름을 딴 막스플랑크협회가 1948년 설립됐다. 전후 폐허의 시대에 기초과학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다. 협회는 현재 85곳의 연구소를 운영한다. 세상이 당장 눈에 띄는 쪽에 자원을 집중할 때, 이들은 기초라는 미지의 땅을 파고들었다. 눈앞의 성과보다 미래를 지향했다. 분야도 자연과학부터 인문사회과학까지 망라한다. 이들이 쌓아 올린 통찰은 문명의 방향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설립 이래 24명(전신인 카이저빌헬름협회 시절 제외)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수상자 대부분 기초과학 분야에서 성과를 냈다. 협회 모토가 눈길을 끈다. ‘통찰이 응용에 앞선다(Insight must precede application).’ 눈앞의 성과를 낳는 건 응용(application)이지만 그 응용을 가능케 한 건 통찰(insight)이다. 이 모토에 담긴 철학은 스포츠로도 고스란히 옮겨 적용할 수 있다.

관중의 함성과 미디어의 조명, 스폰서의 자금 등은 대개 야구·축구 등 인기 종목 그리고 미국 프로골프(PGA), 포뮬러원(F1) 그랑프리 등 대형 이벤트에 쏠린다. 이들 종목과 이벤트의 근원도 거슬러가면 결국 맨손에 몸뚱아리 하나로 뛰고 달리고 헤엄치던 육상과 수영 같은 기초 종목에 가 닿는다. 최근 한국 스포츠에서는 그런 기초 종목으로의 방향 전환 흐름이 감지된다. 당장 눈에 띄는 쪽으로 자원이 쏠리던 그간의 흐름과는 결이 다른, 기초라는 미지의 땅을 파고드는 분위기 말이다. 중요하다고 떠들면서도 중시하지는 않았던 기초 종목의 차분한 성장 조짐이 그 결과다.

지난 3일 끝난 2025 싱가포르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딴 메달은 김우민의 남자 자유형 400m 동메달 하나다. 하지만 메달로 치환하지는 못했어도 단단한 성과가 있었다. 지유찬은 남자 자유형 50m 준결선 순위결정전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수립했다. 여자 자유형 200m의 조현주와 남자 배영 200m의 이주호는 각각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19세 신예 김영범이 가세한 남자 계영 800m에서는 비록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결선 5위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이와 함께 남자 혼계영 400m는 세계선수권 사상 처음으로 결선에 진출해 7위를 기록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성과가 다양한 종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는 점이다. 게다가 여러 선수가 호흡을 맞추는 단체전(계영)에서 돋보였다는 점이다. 개인의 일회성 활약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가 가져온 결과다.

비슷한 구조적 변화는 육상에서도 관찰된다. 올해도 꾸준히 국제대회 시상대에 오르며 세계 1위를 지키는 높이뛰기 우상혁의 경우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테다. 중장거리 종목인 남자 1500m에서 이재웅은 철옹성 같던 한국기록을 32년 만에 새로 썼다. 그리고 불과 2주 만에 자신의 기록마저 갈아엎었다. 단거리 종목에서도 움직임이 있다. 지난해 남자 100m 한국 주니어 기록(10초30)을 경신한 나마디 조엘 진과 신민규·이재성·이준혁이 호흡을 맞춘 계주팀은 지난 5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400m(4×100m) 계주에서 한국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수영의 계영처럼 여러 선수가 호흡을 맞춘 계주에서 결과를 낸 점에 주목한다.

기초과학이 세상을 떠받치는 주춧돌인 것처럼 기초 종목은 스포츠를 지지하는 뼈대다. 스포츠라는 세포 속에는 기초 종목이라는 원형질이 숨겨져 있다. 응용의 결과물이 꾸준하려면 그 토대인 통찰이 선행해야 한다고 앞서 얘기했다. 한국 스포츠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서서히 자리 잡아가는 분위기다. 이런 변화가 과거처럼 일회성으로 그칠 것 같지 않다. 체질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희망의 징후가 보인다. 다양한 종목에서 거둔 성과라는 점, 그리고 한두 명 천재로는 불가능한 계영과 계주의 성과라는 점이 그 징후다. 성과는 반복할 수 있을 때 구조가 되고, 구조는 공유해야만 비로소 문화로 자리 잡는다.





장혜수([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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