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대나무의 지조와 절개를 되새겼을까. 흰 종이에 힘찬 필치로 ‘녹죽’(綠竹·푸른 대나무)이라고 썼다. 왼쪽에는 ‘경술이월 뤼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書)라고 적고, 장인(掌印·손바닥 도장)을 찍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독립운동가 안중근(1879~1910·사진) 의사의 글씨다.
주식회사 태인은 오는 12일부터 10월 12일까지 서울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리는 광복 80주년 특별전시 ‘빛을 담은 항일유산’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 ‘녹죽’을 선보인다고 6일 밝혔다. 유묵은 위인이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뜻한다. ‘녹죽’은 예로부터 구전되어 온 오언시집 ‘추구(推句)’에 등장하는 구절로, 1910년 사형을 앞둔 안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써서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한 소장자가 소유했던 이 유묵은 지난 4월 서울옥션 경매에 나왔고, 고(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차녀인 구혜정 여사가 9억4000만원에 낙찰받았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로 활동하며 안 의사 관련 유물을 찾아 기증해 온 이상현 태인 대표가 어머니 구 여사와 함께 안 의사의 유묵을 품에 안았다.
태인 측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정신을 문화예술과 역사 유산을 통해 함께 기리고자 공개를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가유산청이 주최하는 ‘빛을 담은 항일유산’ 전에는 ‘녹죽’과 함께 안 의사의 또 다른 유묵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도 나온다. 뤼순 감옥에 투옥 중이던 안 의사가 1910년 일본인 간수 과장 기요타(淸田)에게 써준 글씨로 전해진다. 안 의사의 정신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보물로 지정됐다. 이 유묵은 구 여사의 배우자이자 이 대표의 아버지인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이 2017년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한편 ‘녹죽’은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국립합창단의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 공연에서도 소개될 예정이다. 뮤지컬 ‘영웅’의 주요 장면과 넘버를 합창 형식으로 선보이는 연주회다. ‘영웅’에서 안중근 역을 맡았던 배우 양준모가 출연한다.
공연에 앞서 실물 ‘녹죽’을 감상하고, 전문 학예사가 안 의사의 생애를 되짚어보며 유묵의 의미를 설명하는 강연도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