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백악관 허가를 받고 글로벌 전략을 짜야 하는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주 ‘미국에 들어오는 모든 반도체에 관세 100%’를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기업들로부터 미국 내 투자, 판매 수수료 등 각종 대가를 받는 조건으로 ‘관세 예외’를 인정해주는 협상을 이어가고 있어서다.
10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엔비디아와 AMD가 반도체 대중(對中) 수출 허가를 받기 위해 중국 내 칩 판매 수익의 15%를 미국 정부에 내기로 트럼프 행정부와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칩은 엔비디아·AMD의 중국 전용 인공지능(AI) 가속기 H20과 MI308을 가리킨다. 양사는 전임 바이든 정부의 대중 수출 제재를 피해 성능을 떨어뜨린 이 칩들을 중국에 팔아왔는데, 지난 4월 트럼프 정부는 이것도 막았다. 그러다 엔비디아의 적극적 로비로 지난달 미국 정부는 H20의 중국 수출을 다시 허용하기로 했다. 지난 6일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뒤 실제 수출 허가가 발급됐다고 한다. 여기에 ‘15% 수수료 납부’ 조건이 붙었고, AMD에도 적용된다는 거다.
FT는 미국 내에서 “전례 없는 일”, “록히드마틴이 15% 수수료를 내면 중국에 F35 전투기를 팔아도 되냐”는 비판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인텔 CEO의 운명도 ‘트럼프 알현’에 달렸다. 10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립부탄 인텔 CEO가 11일(현지시간) 백악관을 방문할 계획이며, 이 자리에서 ‘친중(親中)’ 오해를 풀고 정부와 협력을 논의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탄 CEO는 지난 7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즉시 사임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중국과 밀착했다는 이유다. 특히 공화당은 탄 CEO가 회장으로 있는 투자사 월든의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 SMIC 투자를 문제 삼는다. 월든은 SMIC가 창업 2년차였던 2001년부터 이 회사에 투자했다. SMIC는 현재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 6%를 점유하며 2위 삼성전자(7.7%)의 턱밑까지 따라왔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트럼프 정부가 인텔 파운드리를 살려 미국 내 투자 유치에 활용하기 위해 경영에 간섭하려 한다고 본다. 인텔의 존재감은 탄 CEO가 “우리는 반도체 기업 10위 안에도 못 든다”라고 말할 정도로 떨어졌지만, ‘트럼프 관세 우회책’으로 인텔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거다.
트럼프 정부가 그간 테슬라, TSMC, 엔비디아 등에 인텔 지분 인수를 제안했다는 설은 계속 흘러나왔다. 11일 대만경제일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TSMC에 인텔 지분 인수를 요구할 거라는 우려가 다시 나온다며, 12일 열릴 TSMC 이사회에서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보도했다.
TSMC 이사를 겸하는 리우진칭 대만 국가발전위원장은 앞서 지난 7일 미국 반도체 관세의 대응책으로 셋을 언급했다. 첫째는 TSMC처럼 미국 내 공장 짓기, 둘째로 미국 내 제조시설 인수하기, 셋째는 UMC(대만 파운드리)처럼 미국 기업과 협력하기다. UMC는 인텔과 협력해 미국에서 12나노 공정 칩을 2027년부터 생산할 예정이다.
한편, 미국 민간 기술업계에서는 ‘중국처럼 일하자’는 열풍이 거세다. 9일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실리콘밸리의 각광받는 AI 스타트업들이 중국 화웨이 식의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6일 근무)을 넘어 ‘0-0-7’(사실상 24시간 7일 근무)을 한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AI 기업 코그니션의 스콧 우 CEO는 새로 인수한 회사 직원들에게 “우리는 주당 80시간 근무하고, 7일 중 6일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7일째는 (집에서) 서로 통화한다”라며 “우리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공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