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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목의 시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이후 36년

중앙일보

2025.08.11 08:18 2025.08.1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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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목 문화선임기자
허진호 감독의 영화 ‘보통의 가족’이 최근 미국 대중문화잡지 ‘버라이어티’가 선정한 ‘2025년 상반기 최고 영화 10편’ 중 하나로 선정됐다. 지난해 가을 국내 개봉 때 흥행하지 못한 영화가 뒤늦게 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변호사 재완(설경구)과 의사 동생 재규(장동건)다. 고교생인 재완의 딸 혜윤(홍예지)과 재규의 아들 시호(김정철)가 술에 취해 노숙자를 폭행, 중태에 빠트리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자식들이 범인인 걸 알게 된 형제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죄를 덮어버리는 게 과연 자식을 위한 일일까. 영화는 충격적 반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 영화 ‘보통의 가족’의 현실
‘내 새끼 지상주의’의 폐해 여전
청소년 자살 막는 대책 마련을

학부모라면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일탈을 가장 눈여겨봤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함 없는 아이들이 왜 저렇게까지 됐을까.’ 강남에 갓 이사와 대치동 학원 뺑뺑이를 하며 학업 스트레스와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시호, 똑 부러지고 성적도 좋지만 부모 몰래 일탈을 즐기는 영악한 혜윤, 둘 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다.

재완이 노숙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혜윤은 “그럼 이제 다 끝난 거 아니야?”라며 미국 명문대 입학 선물로 약속한 스포츠카를 사 달라고 한다. 그제서야 재완은 깨닫는다. ‘사건을 이대로 묻어선 안 되겠구나.’

재규의 아내 연경(김희애)은 위선적 어른의 표상이다. 자식의 범죄를 은폐하려 하고, 자신이 몸담은 봉사 단체 명의의 표창장을 위조해 조카 혜윤에게 건넨다. 아이들을 도덕 불감증과 일탈로 내모는데 부모도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 속 아이들을 괴물로 만든 건, ‘내 새끼 지상주의’ ‘성적 지상주의’다. 영화는 아이들이 병들어가는 사회를 거울처럼 비춘다. 좌절과 고통 속에 아이들은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자학 또는 자해한다. 중고생 10명 중 3명 이상이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한다(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한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세계 1위다. 인구 10만 명당 7.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를 넘는다. 외국은 10대의 주요 사망 원인이 사고·질병이지만, 우리나라는 자살이다.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갈수록 심해지는 입시 스트레스다.

‘4세 고시’ ‘7세 고시’ 등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너무 일찍 경쟁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지난해 정신과를 찾은 학생이 30만 명이 넘는다. 강남의 정신과 병원은 예약 잡기도 힘들다는 건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아이들의 고통과 불행에 무심하다. 청소년 자살의 비극은 너무 빨리 잊힌다. 애도는 잠시뿐, 또다시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한다.

인공지능(AI)과 함께 공부하고 일하는 시대다. 호기심과 창의력, 비판적 사고와 감성 지능이 경쟁력이다. 정답 기계로 만드는 주입식 교육과 전통적 대학 시스템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맹목적 신념과 막연한 불안 때문에 채찍질을 멈추지 못한다. 대치동에서 20년 간 청소년 상담을 해온 손성은 정신과 전문의는 본지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는 공부 잘할 아이도 학을 떼게 하고, 창의성 있는 아이들을 의사·법조인 등 특정 직업에 몰아넣는다”면서 “아이도 불행하고 부모도 불행하고, 성공 보장도 없는데 입시에 성공한다는 몇 가지 노선이 진리인 것처럼 많은 사람을 세뇌해 달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개봉한 게 36년 전이다. 부모의 성적 압박에 시달리다 투신자살한 여학생 은주(이미연)의 슬픈 사연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후 성적 지상주의는 점점 더 공고해졌고, 명문대 입학이 지상 최고의 가치가 됐다. 더욱 슬픈 건, 그 영화를 보며 눈물 흘렸던 젊은이들, 이른바 ‘X세대’가 ‘헬리콥터 맘’ ‘컬링 부모’가 돼서 자식들을 입시 지옥으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행복은 성적순인 것으로 판명났으며 아이들은 오직 의대만 바라보고, 출산율은 0.7이 됐다’ ‘그 시대에 이런 구조를 만든 기성세대를 탓했던 이들이 부모가 돼서 결국 같은 일들을 반복한다는 게 아이러니다.’

포털사이트 영화 관람평에 올라온 촌철살인의 글들이다. 출산율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고민하기에 앞서, 아이들을 자살로 내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먼저 아닐까.





정현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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