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하고 과묵한 유비(劉備. 161~223)가 재능을 보인 분야는 명마 감별과 리더십이었다. 누군가의 능력을 알아보고, ‘마음을 사는’ 재능을 그가 타고났기 때문이다. 가난했고 체구도 보통이었지만, 그는 장비(張飛)와 관우(關羽)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번 사자성어는 삼고초려(三顧草廬. 석 삼, 돌아볼 고, 풀 초, 오두막집 려)다. 앞 두 글자 ‘삼고’는 ‘세 번 찾아가다’란 뜻이다. ‘초려’는 ‘초가집’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누추한 초가집을 세 번이나 방문하다. 즉 인재를 초빙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정성을 다하다’란 의미가 만들어졌다. 삼국 시대의 영웅 유비가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초빙하기 위해 세 번 방문한 일화에서 유래했다.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지역을 중심으로 촉한(蜀漢. 221~263)을 개국한 유비는 꽤나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작은 조직의 리더로 부상하더니, 마침내 조조(曹操)와 손권(孫權)의 경쟁자가 된다. 그가 천하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과정은 TV 역사극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유비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짚신이나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해결할 정도로 궁핍한 청소년기를 겪었다. 15세에 그는 친척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노식(盧植) 문하에서 유교 경전 학습 기회를 가졌다.
황건적에 맞서 의병을 조직한 후, 유비는 여러 전투를 거친다. 젊고 유능한 전략가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동탁(董卓), 원소(袁紹), 원술(袁術) 등에게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여포(呂布)를 품었다가 배신당하기도 했다.
와룡강(臥龍江) 인근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는 젊은 제갈량에 대한 소문을 접한 유비는 그를 군사(軍師)로 초빙하고 싶어졌다. 만약 제갈량을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초빙은 고사하고 대화할 기회조차 갖지 못할 것이라는 누군가의 조언을 들은 유비는 내심 기뻐했다. 그는 오히려 이 특수성을 적극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하필이면 추운 겨울 어느 날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설득한 후, 길을 나서 제갈량의 처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 첫 방문에서 유비는 제갈량과 함께 사는 동자(童子)와 짧은 대화를 나눈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어 두 번째 방문에서도 제갈량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식 교제에서 두 번 방문했으면 이미 충분히 성의를 보인 셈이다. 이쯤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뭔가 소식이 오게 마련이다. 유비가 이런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릴 것을 뻔히 알지만, 제갈량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제갈량 입장에선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상대방이 자초한 딜레마였고, 유비의 다음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비에게는 상인 감각이 있었다. 평생에 걸쳐 리더로서 적극 양보한 것과 끝까지 지켜낸 것을 살펴보면, 그가 꾸준히 연마한 상인 기질이 더 확연히 드러난다. 제갈량의 반응을 기다리던 유비는 세 번째 방문을 결행한다.
‘삼고초려’ 고사를 낳은 이 세 번째 방문에서 마침내 제갈량은 마음의 문을 연다. 자신의 참여를 간절히 원하는 유비의 확고한 결심을 행동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 ‘삼고초려’ 일화는 유비와 제갈량을 평생 단단히 묶어주는 상징이 된다.
제갈량을 초빙한 후, 유비는 손권과 손을 잡고 ‘적벽 대전’에서 조조의 기세를 꺾었다. 이어 비옥한 쓰촨성과 징저우(荊州) 일대를 통치하는 세력의 리더로 재탄생했다. 안타깝게도 유비는 삼국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향년 62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유비와 제갈량은 각지의 호족 세력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여러 야심가들이 힘을 겨루던 중국사의 큰 혼란기를 살았다.
제갈량을 초빙해 군대의 전권을 위임하기 전에 유비는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 경쟁자들에 비해 재력이나 병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유비의 전투 지휘 능력도 낙제점을 겨우 면한 수준이었다. 그가 기사회생할 때마다 더 가치를 인정받는 인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건, 삼고초려로 대변되는 그 만의 리더십 스타일이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