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운이 좋은 편이다. 무슨 말이냐고? 지난달 말 대미·대남 업무를 총괄하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이틀에 걸쳐 발표한 담화를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담화는 이재명 정부와 트럼프 2기 행정부를 향한 북한의 공식 입장이었다.
먼저 한국엔 앞으로 마주 앉을 일이 없다고 했다. 서울에서 어떤 정책을 수립하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문재인 시즌 2에 올인하고 있다. 대북 전단 살포를 중단하고, 전방 확성기를 철거하고, 2016년 북한인권법 제정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았던 인권보고서 발간을 올해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조만간 윤석열 정부 때 효력 정지시킨 9·19 군사합의를 복원할지도 모른다. 하나같이 북한이 껄끄러워했던 사안들이다.
하노이 때보다 강화된 북한 입지
김여정, 핵보유국 지위 요구
한·미, 북핵 ‘스몰딜’유혹 떨치길
한국의 경우 보수·진보 정권에 따라 판에 박힌 대북정책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딱히 운이 좋다고 할 순 없지만, 미국의 경우엔 거의 횡재에 가깝다. 김여정은 워싱턴을 향해선 일단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협상을 하려면 북한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와 능력, 근본적인 지정학적 환경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을 가진 국가 대 국가, 이를테면 미국과 러시아처럼 핵 군축 협상을 하자는 것이다.
딱 6년 전인 2019년 베트남 하노이까지 전용열차를 타고 갔다가 빈손으로 쓸쓸히 사흘 길을 되돌아서 귀국한 김정은. 당시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영변 핵시설을 폐기할 테니 대북 제재를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그때 트럼프가 수용했다면, 북한 핵 개발의 ‘심장’인 영변 핵시설은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협상은 결렬됐고,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은이 그토록 목을 맸던 제재 해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중 패권 경쟁이 가열되면서 그의 손안에 굴러 들어왔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에서 북한의 대변인 노릇을 했고, 대북 제재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핵보유국인 러시아는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영변 핵시설은 건재한 채 말이다. 김정은으로선 하노이에서 합의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천운이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릴 상황이 된 것이다.
김정은의 운은 당분간 이어질 수 있다. 김여정 담화에 대한 한·미 반응을 보면 그렇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여전히 북한 비핵화를 위해 김정은과 대화하고 싶다는 입장을 냈다. 대북정책특별부대표를 맡고 있는 세스 베일리 국무부 부차관보 대행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합의에서 다시 협상을 시작하자고 했다.
당시 트럼프와 김정은은 1.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2.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3.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노력 4.전쟁 포로와 실종자 유해 수습·송환 등 4개 항이 담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개 항 가운데 김여정은 이제 3번과 관련된 협상은 핵보유국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북한을 ‘핵을 가진 국가(nuclear state)’라고 부르는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소통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실도 “남북 간 신뢰를 회복하고 북·미 회담 재개를 촉진하는 여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환영했다.
앞으로 김정은을 만난다면 트럼프는 분명 과거보다 터프한 김정은을 상대해야 한다. 하노이 때보다 훨씬 나쁜 협상안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언제 급변할지 모른다. 15일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 진행된다면 앞으로 평양과 모스크바의 관계가 지금과 같은 밀월 관계가 아닐 수 있다. 미·중 패권 경쟁 양상에 따라 과거 확고한 핵 비확산 노선을 걸어온 베이징(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이 다시 북한의 핵·미사일을 골칫거리로 인식하는 때가 올 수도 있다. 1945년 북한 건국 이후 북·중·러 관계는 긴 호흡으로 보면 굴곡의 역사였다.
25일 이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트럼프와 첫 정상회담을 한다. 관세 협상 후속조치, 한·미 동맹 현대화와 같은 굵직굵직한 현안과 함께 두 정상은 재임 중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모든 일엔 때가 있다. 두 정상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는 모호하게 놔둔 채, 핵·미사일 능력 축소와 경제 제재 해제 및 북·미 관계 수립 등을 주고받는 ‘스몰 딜(small deal)’의 유혹을 떨쳐버렸으면 좋겠다. 어찌 알겠나. 지금의 김정은처럼, 훗날 두 정상이 그때 그런 합의를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느냐며 가슴을 쓸어내릴 날이 올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