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신청하기 위해 소양(반공) 교육을 받던 때로 기억된다. 반공 의식을 고취하려고 틀어준 영상은 김일성대 정문을 걸어 나오던 여대생을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이들에게 기자가 다가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었다. 당연히 “김일성 수령님 같은 멋진 남성”이라고 답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답은 달랐다. 아니 아예 답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웃기만 했다. “아,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아무리 정권이 빨갛게 만들려고 해도 빨갛게만 변할 수 없는 게 인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반공 교육은 인간과 체제에 관한 강렬한 질문만 남겼다.
체제가 인간성을 지배할 수 없어
북한 정권만 상대하는 정책 실패
북 주민이 단절 속에 살지 않도록
공감을 전하고 사실을 전파해야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지나는 동안 지적인 호기심은 학문적 의심을 거쳐 ‘인간은 체제보다 강하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카를 마르크스는 반대로 생각했다. 인간성이란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인 경제체제가 결정하므로 계급투쟁이 없어지는 사회주의에서는 이기심이 사라지고 이타적 인간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도 가난에 시달리면서 일찍 죽은 아들의 관조차 사지 못하자 극도로 괴로워했던 한 사람이었다. 인간은 생존하고, 사랑하고, 가족을 이루려 한다. 부모는 자식을 지키려 생명을 다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과는 자유롭게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한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마저 허락하지 않는 체제는 미래가 없다. 거대한 권력은 작은 개인을 짓밟을 수 있겠지만, 생존과 자유, 존엄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은 장기적으로 어떤 지배 질서보다 질기고 강하다.
해외에 파견된 북한 근로자의 말을 접한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것을 들었고 보았다. 북한이 가난한 이유도 김씨 일가 때문임을 알게 됐다.” 사람은 느끼고 생각한다. 김정은이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래 10년이 더 지났으나 북한의 경제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 남한 드라마를 보고 말투를 썼다고 처벌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 정권은 시장이 자본주의 의식을 고취하고 남한 문물의 유통 경로가 된다고 판단하여 억압한다. 그러나 시장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 벌어진 틈으로 진실은 스며든다. 소련 청년도 암시장을 통해 공식적으로 금지된 청바지를 구매하면서 자본주의를 동경하게 됐고, 비틀스 음악을 들으면서 자유를 느꼈다. 사상통제를 강화해도 별 효과가 없다. 탈북민 자료로 연구한 결과, 생활총화를 더 받아도 체제에 대한 충성도는 올라가지 않는다. 특정한 시장 활동을 몇 년 이상 수행하면 노동당원조차도 자본주의로 마음이 기운다.
보수와 진보의 고착된 시각으로썬 북한 문제를 풀 수 없다. 북한을 적으로 부른다고 통일이 오지는 않는다. 통일은 남북 주민 사이 진심이 통할 때 이루어진다. 독일도 그랬다. 통일 전 서독 정부의 정책은 동독 주민과의 유대를 늘려가는 데 목적이 있었다. 체제라는 높은 담 너머에 사는 그들도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가족을 돌봐야 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 인간임을 잊지 않았다. 거대한 담론보다 이들을 구체적으로 도우려 했고, 보수와 진보 정부를 불문하고 그 방안을 일관되게 실행했다. 이런 공감의 정신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범죄에 대한 독일인의 통절한 반성으로 더 커졌을 것이다.
5만60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됐던 독일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지금은 기념관이 된 그곳에는 사람의 체온인 36.5도를 항상 유지하도록 설계된 금속판이 야외에 전시돼 있다. 인종이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우리는 같은 체온을 가진, 같은 인간임을 언제나 잊지 말자는 다짐 같았다. 부헨발트의 사람들을 죽음에 대한 공포만큼 힘들게 했던 것은 자신의 억울한 운명을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는 ‘단절과 잊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북한 주민을 잊지 않고 있는가. 잊지 않고 공감하고 있음을 알리려 얼마나 애쓰고 있나.
북한 정권만 상대해서는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는다. 독재국가의 권력자에게 평화는 목적이기보다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다. 권력에 방해되는 평화는 버려진다. 반면 주민은 전쟁을 싫어한다. 경제적 생존이 힘들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가족이 헤어지는 고통이 두려워서다. 북한 주민의 목소리가 커져야 남북 간 평화도 자란다. 평화를 위해 북한 정권을 설득하는 노력은 필요하나 한계는 뚜렷하다. 북한 주민의 역량을 키우고 이들에게 사실을 전하려는 꾸밈없는 노력이 근본적인 해결법이다.
광복 80주년이 됐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여전히 미완성 상태다. 핵심은 사람이다. 사람을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진실히 대하는 사회가 통일을 이룬다. 남북 주민 사이의 따뜻한 공감 없인 진정한 평화도 오지 않는다. 북한 권력자만 쳐다보고 그 정권만 상대했던 정책은 실패를 거듭했다. 체제가 인간성을 지배할 수 없다. 결국 사람이 체제를 이긴다. 북한 주민이 체제보다 커질 때 광복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