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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 의심받던 박정희, 반공을 국가 이념 삼았다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 ⑲]

중앙일보

2025.08.12 08:32 2025.08.1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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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⑲ 5·16 군사정변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서울 시내에 도열한 박정희(가운데)와 박종규(왼쪽), 차지철(오른쪽). 박종규와 차지철은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뒷날 모두 대통령 경호실장이 된다. [중앙포토]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 가지, 박정희 시대를 거쳐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이르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 현대사에 깊은 발자국을 남긴 박정희 시대는 알다시피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시작됐다.

61년 4월 21일 : 쿠데타를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고 있다. 육군 지휘관들은 정치인들이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본다.

23일 : 음모는 육군과 학생, 개혁가들이 지지하고 있다.

24일 : 군부 음모에 대한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견해. 박정희를 체포하고 싶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 체포가 쿠데타를 촉발할지 모른다.

5·16이 일어나기 직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가 워싱턴 본부에 보고한 내용들이다. 모의가 사전에 알려진 셈이다. 그런데도 쿠데타는 국군 60만 명, 주한미군 5만6000명이 있던 나라에서 단 3600명의 병력만으로 성공했다. 5·16의 주축이었던 김종필은 “혁명은 숫자가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가 말한 ‘의지’가 정변 세력의 그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5·16의 성공에는 ‘의지 없음’도 크게 작용했다. 쿠데타를 막으려는 의지가 누구에게도 없었다.

1950년대 후반 들어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젊은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특히 군 내부의 파벌 대립을 두고서였다. 젊은 장교들이 보기에 각 파벌의 정점에 선 몇몇 장군들은 숙청 대상이었다. 장군들이 물러나지 않음으로써 생긴, 인사적체 불만도 있었다. 김종필 육군본부 첩보부대 행정처장(중령)을 비롯한 영관급 장교들은 공개적으로 장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整軍) 운동’에 나섰다. 김종필의 처삼촌인 박정희는 장군이었지만 영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자신, 상관인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사회도 혼란스러웠다. 여기저기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 반대 데모까지 있었다. 59년 5.7%였던 경제성장률은 60년 2.4%로 떨어졌다. ‘정군’을 요구한 군부 개혁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사회 개혁까지 꿈꾸지 않았을까.

김일성, 61년 3월 “남한 군부 반란 가능성”
박정희와 김종필은 61년 2월 쿠데타를 결의했다. 모의는 각종 정보 레이더에 걸렸다. 심지어 북한도 낌새를 챘다. 61년 3월 31일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이 베이징에 보낸 전문에는 ‘김일성이 남한 군부 내 반란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내각 수반인 장면 총리는 쿠데타 정보를 그간 몇 차례 있었던 정군 움직임 정도로 여겼다.

5월 16일 새벽, 쿠데타가 일어났다. 한강 인도교에서 헌병대와 총격전이 오갔을 뿐, 그 이상 쿠데타를 막아서는 세력은 없었다. 정부와 군을 이끌고 쿠데타를 막았어야 할 장면 총리는 당일 새벽 4시 쿠데타 소식을 듣고 혜화동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마셜 그린 주한 미국대사 대리(왼쪽)와 카터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 이들은 애초 쿠데타에 반대했다. [중앙포토]
그날 아침, 장면은 마셜 그린 주한 미국대사 대리에게 직접 전화해 자신이 멀지 않은 곳에 피신했다고 알렸다. 오전 11시쯤 그린은 카터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상징적 국가 원수인 윤보선 대통령을 만났다. 매그루더는 이한림 사령관 휘하 1군을 동원해 서울을 포위하겠다는 쿠데타 진압 방안을 제시했다. 윤보선은 반대했다.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 있고, 국군 상호 간에 교전하면 북한이 남침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윤보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묘했던 모양이다. 면담 직후 매그루더와 그린이 각각 본국에 보낸 보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윤보선이 정치 적수인 장면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받아들일 만한 방법으로 쿠데타를 간주하는 듯했다.”(매그루더), “윤 대통령이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 말하면서 거국 내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 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고 했다.”(그린) 필자가 보기에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이 군에 복귀하면 자신을 중심으로 한 민간 정부가 들어설 것으로 예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윤보선(左), 장면(右)
매그루더가 진압 방안을 내놨으나 정작 미국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16일 오전 10시18분 매그루더는 본국 정부와 상의 없이 쿠데타에 반대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윤보선을 만난 건 그 직후였다. 그러고 몇 시간 뒤 매그루더에게 미국 정부의 공식 지침이 전달됐다. “공산주의 침략에 관한 한국의 방위 임무 외에 더 이상의 성명을 내는 것은 피할 것.”

당시 미국의 지상 목표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면 정부는 미더운 파트너가 아니었다.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 휴 팔리 부처장은 ‘1961년 2월 현재 한국의 상황’ 보고서에서 “장면 정부의 독직·부패·무능이 한국을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 공산혁명 같은 극단적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5·16 군사혁명위원회가 내건 혁명공약 6개항. [중앙포토]
미국이 걱정한 것은 박정희의 사상이었다. 박정희는 군부 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조직책 혐의로 48년 체포됐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형 집행정지되고 다시 군에 투신했다. 전력이 있었기에 5·16 후 미국은 박정희가 반미·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의심했다. 이를 의식해서일까. 박정희는 혁명공약 1조를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로 했고, 쿠데타 직후인 16일 오전 용공세력 색출을 지시했다. 결국 5월 18일 체스터 볼즈 미 국무차관은 “박정희가 반공·친미적”이라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4·19 혁명을 성공시킨 시민도 5·16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승만에게 맞서 민주주의를 주창했던 진보 잡지 ‘사상계’는 6월호에 이런 글을 실었다. ‘5·16혁명은 (…)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 무능하고 고식적인 집권당과 정부가 수행하지 못한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5·16은 이렇게 시대의 혼란, 장면의 도피, 윤보선의 외면, 미국의 용인, 시민의 기대가 어우러져 박정희 시대를 여는 트리거(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18년간의 박정희 시대를 특징짓는 표현은 ‘고속 성장’과 ‘독재’일 것이다. 성장에서 박정희의 역할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부가 강력히 주도한 경제개발이 힘을 발휘했다. 당시 씨앗을 뿌린 중화학공업과 수출산업은 박정희 시대 이후에도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엔진이었다.

“한강의 기적은 국민 역량 최대 투입 결과”
그러나 대통령의 지도력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잘살아 보려는 국민의 의지,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 국제 경기 활황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카터 에커트는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의 뛰어난 자질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무엇보다 국민 역량이 최대한 결집되고 투입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고속 성장 뒤엔 늘어난 외채,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 빈부격차, 짓밟힌 노동 인권 등등 그림자도 있었다. 소득이 늘고 의식이 깨어나며 국민은 성장의 뒤편과 더불어 독재의 그림자를 강하게 깨닫게 됐다. 63년과 67년 대통령 선거에 이은 71년 3선 개헌 때만 해도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야기도 이것이 마지막”(71년 4월 25일 서울 유세)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통했다. 그러나 72년 10월 유신은 박정희의 정치적 정당성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박정희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겠지만, 국민의 입장은 “더 이상 당신은 안 된다”였다. 74년 2월 CIA가 작성한 문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항거가 박정희 정권의 특정 정책이 아니라 박정희 본인과 그가 수립한 유신 체제에 집중되고 있다. 심각할 정도로 많은 국민이 저항하고 있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부산에 탱크가 진주한 모습. [중앙포토]
항거는 갈수록 거세졌다. 79년 10월 야당인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한 게 도화선이 돼 부산·마산 지역 시민들이 격렬하게 들고일어나는 등(부마항쟁) 각지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결국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사회 혼란 속에서 총성으로 막을 올렸던 박정희 정권은 다시 극도의 혼란 속에서 총성으로 막을 내렸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장기집권은 이후 7년 단임제(5공화국), 5년 단임제(6공화국)라는 헌정 체제를 낳았다. 최근에는 87년 체제인 5년 단임제에 대해 개헌 논의가 불거지고 있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다음은 ‘수능 30년, 그리고 사교육’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5·18 광주민주화운동’ 순입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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