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땅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달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1912년 8월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뒤늦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인쇄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달리는 것을 좋아해 압록강변을 달리던 그를 알아본 건 당시 육상 명문 양정고보(현 양정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진학했지만 굶는 날이 수두룩했다. 배가고파 뛸 수 없던 그는 김수기 선생을 찾아가 울었다. “5전이면 된다”며 매달리던 그에게 교사는 2엔을 건넨다.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이 10전이던 때였는데, 손기정은 그 돈을 받아 화신백화점 식당에서 ‘영양 보충’을 했다.
미국서 유학하던 마라토너 권태하(1906~1971)의 편지에 손기정은 장거리 달리기에서 마라톤으로 전향한다. “일본의 강압정치를 배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세계 스포츠 무대에 진출해 활약해서 코리아(Korea) 이름을 세계 각국에 알리는 것이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이후 4년간 일본에서 우승을 거머쥔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딴다. 태극기를 그가 처음 본 것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봉근의 집에서였다. 베를린에서 두부공장을 하던 그는 손기정과 2위를 한 남승룡 선수를 불러 축하연을 했다. 당시 일장기 말소 사건을 모른 채 서울로 돌아와 손기정은 일제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연행당하듯 끌려갔다. 데라시마 젠이치 메이지대 명예교수에게 손기정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당시 일제를 위한 ‘학도병 모집 연설’을 꼽기도 했다. 해방 후엔 한국 마라톤 육성에 뛰어들었고, 1988년 올림픽 개막식에서 첫번째 성화 봉송 주자로 뛰기도 했다. 2002년 11월 15일 지병으로 향년 90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