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창덕궁에 큰불이 났다. 3년에 걸친 재건 공사 후 1920년 완공된 희정당과 대조전, 경훈각에 각각 벽화를 장식하기로 결정됐다. 궁궐에선 전례가 거의 없던 부벽화(附壁畵), 즉 비단에 그림을 그린 뒤 종이로 배접하고 벽에 부착하는 방식의 벽화다. 일본인의 총감독 하에 이뤄진 재건이라 일본식 장벽화(障壁畵, 일본 전통 건축의 실내 회화 양식)의 영향도 감지된다. 다만 화가들은 앞서 병풍이나 족자 형태에 담았던 조선 전통의 궁중 장식화 화풍을 따랐다. 이미 황위에서 물러난 순종(재위 1907~1910) 내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백학이 날고 천도복숭아가 탐스러운 청록빛 산수화가 근대 궁궐의 공간을 채웠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궁중회화인 창덕궁 벽화 6점이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 한데 모였다. 13일 언론공개회를 가진 개관 20주년 특별전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8월14일~10월12일)를 통해서다. 각각 높이 180~214㎝, 너비 525~882㎝에 달하는 대작들로 2013년부터 차례로 보존처리 후 박물관에 보관돼왔다. 대조전에 걸렸던 ‘백학도’의 경우 초본(草本, 구상 단계의 밑그림)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현재 창덕궁의 각 전각엔 모사도 혹은 영인본이 걸려있다.
이 가운데 김규진(1868~1933)이 그린 희정당 벽화 2점(‘총석정절경도’ ‘금강산만물초승경도’)은 궁중회화로는 처음으로 금강산을 소재로 삼았다. 당시 금강산이 일제에 의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일반인의 관심이 크게 늘었고, 김규진 본인도 배를 타고 스케치 유람을 다니기도 했다. 이홍주 학예연구사는 “겸재 정선이 확립한 진경산수화의 전통 속에서도 빛의 방향에 따른 명암의 변화 등 근대 서양화의 영향이 보인다”고 말했다. 대한제국의 궁내부 관원이었던 김규진은 사설 미술교육기관인 서화연구회를 통해 전통 회화를 이으면서 사진사로도 활동했다.
대조전과 경훈각 벽화는 1912년 창설된 서화미술회 측이 맡았는데 실제 그린 이는 김은호·오일영·이용우·이상범·노수현이다. 훗날 조선 근대화단의 거목이 되는 이들이 20대 때 생산한 대작들인 셈이다. 대조전에는 오일영(1890~1960)과 이용우(1902~1952)가 합작한 ‘봉황도’와 김은호(1892~1979)가 그린 ‘백학도’가 마주 걸렸다. 경훈각에는 노수현(1899~1978)의 ‘조일선관도’와 이상범(1897~1972)의 ‘삼선관파도’가 걸렸다. 속세를 벗어난 신선 세계를 묘사하는 그림 2점으로 보존처리 후 처음 공개됐다.
전시 제목은 각각의 그림 한 귀퉁이에 적힌 근사(謹寫)라는 표현에서 왔다. ‘삼가 그려 올린다’는 의미다. 껍데기만 남은 왕실이지만 권위를 받들며 예의를 다했다. 그러면서 화가 이름을 남겼다. “궁중화에 화가 이름이 명시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 근대적 개인화가의 면모가 이렇게 드러난다”고 박수희 학예연구관은 말했다. 정용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100년 전 각각 따로 걸렸던 창덕궁 벽화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전시 2실에선 6점의 벽화들을 재구성한 디지털 실감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관람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