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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1등상 받게해준 우리 할머니, 엔딩크레딧에 실었어요”

중앙일보

2025.08.13 08:31 2025.08.1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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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자아를 찾아가는 영순. [사진 KAFA]
“큰 상도 받고 관객과도 만나고, 이 모든 게 돌아가신 할머니가 주신 선물 같아요.”

단편 영화 ‘첫여름’을 연출한 허가영(29·사진) 감독은 요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영화가 올해 칸 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1등상을 받은 데 이어, 지난 6일 메가박스 단독 개봉으로 국내 관객과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허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 작품인 ‘첫여름’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춤 바람 난 할머니의 자아 찾기다. 손녀의 결혼식 대신 콜라텍에서 만난 연하 남자친구 학수(정인기)의 사십구재에 가고 싶은 영순(허진)의 이야기를 그렸다.

남편의 병 수발을 하던 영순은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봐 준 유일한 사람인 학수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다. 그리고 늦게나마 할머니·엄마·아내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영순 캐릭터는 허 감독의 외할머니에서 비롯됐다. 할머니 이름을 엔딩 크레딧에 새겨넣은 이유다.

5일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만난 그는 “대학생 시절, 할머니가 들려준 남자친구 이야기가 연애담 같기도, 트라우마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영웅담 같기도 했다”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연민 속에서도 춤을 출 때 가장 나다워진다며 꿈꾸듯 말하던 할머니의 상기된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후 할머니의 사십구재에 참석한 허 감독의 귀에 불경 소리가 콜라텍 음악처럼 들렸고, 머릿 속에는 대웅전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첫여름’은 이 장면에서 시작됐고, 이 장면을 위해 질주하는 영화”라며 “영순의 찬란한 시절을 되찾아주고 싶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첫여름’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영순은 결혼을 앞둔 손녀에게 란제리 세트를 선물하며 “너를 즐겁게 해주는 남자가 최고”라고 말한다. 딸에게는 자신이 가부장제 그늘에서 얼마나 숨 막히게 살아왔는지 토로하며, 앞으로 춤추며 신나게 살 거라고 선언한다. 허 감독은 “한국 영화에서 영순 같은 캐릭터는 한번도 등장한 적 없었다”면서 “관객들이 ‘할머니’ 영순이 아닌, ‘여인’ 영순과 동행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노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욕망은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무시돼 왔죠. 노인에 대한 개념을 깨부수고 뒤집고,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영화를 본 관객들이 다가올 자신의 노년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정현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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