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외교부 장관이 14일 북·미 대화와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돌파구(breakthrough)를 만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북한이 핵을 보유할 수 없다는 입장이므로 '밀당'(밀고 당기기)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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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돌파구 위해 트럼프 리더십 필요"
조 장관은 이날 취임 후 첫 내신 기자 간담회에서 "지난달 말 미국을 방문해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백악관의 여러 참모를 만나 '지금 상황에서 새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미국 측도 이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북한이 미국과 대화를 한다면 '핵보유국의 자격을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라며 "그러나 현재까지의 미국은 '북한이 핵을 보유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밀당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도 "(북·미 대화는) 완벽하게 비핵화를 전제로 하고 협상할 수 없듯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군축 협상만으로 진행할 수도 없을 것"이라며 "그 사이 어디선가 접점을 찾아 (북·미가) 협상을 시작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양 측 간 입장 차이가 크다는 취지로 읽히지만, 북핵 위협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국인 한국의 외교 수장이 북한 비핵화 목표를 ‘밀당’의 대상으로 언급한 건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 외교장관 회담과 백악관 입장 등을 통해 양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여러 차례 확인했다. 그런데 '밀당'이라는 표현이나 ‘완벽하게 비핵화를 전제로 협상할 수 없다’고 발언한 건 이런 완전한 비핵화 목표가 조정 가능한 것처럼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비핵화와 군축) 사이 어디선가 접점을 찾아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는 발언도 자칫 북한의 군축 대화 요구에 여지를 주는 듯 보일 우려가 있다.
앞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달 29일 대미 담화에서 북한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과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접촉 출로를 모색하라"며 군축 협상을 사실상 공개 요구했다.
조 장관은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계기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에 대해선 "가정적인 상황"이라면서 "외교는 희망을 근거로 정책을 만들면 안 된다. 실패한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서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 최근 여권과 정부 일각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APEC 정상회의에 초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부 내부적으로는 현실성이 적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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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주한미군 감축 고려 안 해"
조 장관은 오는 25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 테이블에 오를 '동맹 현대화' 사안에 대해선 "실무에서 긴밀하게 협의·협상하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규모 및 역할 변경을 수반할 수 있는 동맹 현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이와 관련, 최근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이 "주한미군 내 변화가 필요하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역량"(지난 8일, 기자간담회)이라며 주한미군 감축을 시사한 것 관련,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숫자 문제는 자기 (개인적)의견을 얘기한 것으로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이 당국자는 "그 발언은 상징적 언급(symbolism)이라고 생각한다"며 "최근 만난 미국의 상원의원은 (주한 미군 감축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이 방미에 앞서 오는 23일 방일부터 하기로 한 데 대해선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이재명 정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취임 후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찾은 건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 이후 이 대통령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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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멀티 트랙' 외교"
조 장관 또한 지난달 말 첫 출장으로 일본을 먼저 방문한 뒤 미국으로 향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이 대통령의 지침이었다"며 "이재명 정부에 대한 잘못된 프레임 또는 낙인(stigma)이 있었는데 이번에 대통령이 일본부터 가면서 미국 내에서 가지고 있던, 또는 잘못 입력된 우리 정부에 대한 편견이 일거에 사라지리라 생각한다"라고 예상했다.
조 장관은 이날 한·일 관계에 대해 인구 감소, 지방 소멸 문제 등을 두고 다방면으로 협력하는 '멀티 트랙 외교'를 언급하기도 했다. 과거사와 미래지향적 협력을 분리 접근하는 이재명 정부의 '투트랙' 대일 외교를 더욱 다변화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한편 중국에 대해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서해에서 우리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나오고 있다"며 중국이 한·중 잠정조치수역(PMZ)에 무단으로 설치한 구조물 문제를 겨냥했다.
왕이(王毅) 중국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의 방한에 대해선 "순서·격식을 따질 게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하면 상호 방문도 하는 방향으로 실용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고 조 장관은 설명했다. 왕 주임의 방한 전 조 장관의 방중이 먼저 이뤄질 가능성도 열어둔 셈이다.
이런 가운데 미·중·일·러 4강 대사를 비롯해 상당수 재외 공관장이 공석인 상황에 대해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대통령실에 신속한 인사 필요성을 말씀드렸다"며 "주도면밀하게 작업하며 전문성·적합성 등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외교)공백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할 수 있는 직원 보강을 빠르게 했고 고위직 직원이 추가로 파견된 곳도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