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가 15일 일본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패전일 추도식에서 ‘반성’을 언급했다. 일본 총리가 ‘종전(終戰)’으로 불리는 전국전몰자 추도식에서 반성을 언급한 것은 2012년 이후 처음이다. 다만 전쟁에 대한 책임,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의 발언은 없었다.
이시바 총리는 이날 추도식에서 “지난 대전(大戦)에서 80년이 지났다”며 “지금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다수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전쟁의 참화를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전쟁의 반성과 교훈을 지금 다시 깊이 가슴에 새겨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80년간 우리나라는 일관되게 평화국가로 나아가며 세계 평화와 번영에 힘써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비통한 전쟁의 기억과 부전(不戦)에 대한 결연한 다짐을 세대를 넘어 계승해 항구 평화를 향한 행동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역사문제에 대해 온건파로 분류되는 이시바 총리는 이번 추도식에서 앞선 정권과 달리 ‘반성’을 언급한 데 대해 마이니치신문은 “이시바 총리가 힘을 쏟은 부분”이라고 전했다. 이시바 총리의 언급이 “아시아에 대한 가해에 한하지 않고, 전쟁에 이른 경위 및 전후의 문민(文民) 통제 자세 등도 포함해 되돌아보자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라는 설명도 보탰다. 이시바 총리의 ‘색깔’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 역시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이번 추도사에는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않으려면 지난 전쟁에 대한 반성이 불가피하다’는 총리의 생각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한국 대통령실은 이시바 총리의 반성 언급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시바 총리가) 반성을 언급한 점에 있어 주목하고 있다”며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과거 아픈 역사를 직시하면서 국가 간 신뢰가 서로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나은 미래와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본다”고 했다.
일본 총리가 패전일에 ‘반성’이란 단어를 언급한 것은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 때부터다. 당시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의 가해 책임을 언급하며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필설(筆舌)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한 희생을 초래했다”면서 “깊은 반성과 함께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후 역대 총리들은 패전일에 반성을 언급해왔지만 2013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재집권에 성공하면서부터는 사라졌다.
이번에 이시바 총리가 내놓은 추도사 역시 반성 표현을 제외하면 대체로 역대 총리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날 일본 정부 대변인격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관방장관은 회견을 통해 “이시바 내각은 총리 담화를 비롯해 역사 인식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 무라야마 총리가 1995년 ‘통렬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언급한 총리 담화를 내놓은 이래 일본 정부는 10년에 한 번꼴로 각의(국무회의 격)를 거쳐 총리 담화를 내놨지만, 이번 80주년에는 이 같은 담화를 내지 않았다. 이시바 총리는 패전 80년을 맞아 총리 담화 발표를 검토했으나 옛 아베파 등 자민당 내 보수파의 반발로 보류했다고 한다.
이날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는 정부 고위 각료와 정치인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쟁했던 잠룡들의 참배였다. 최근 참의원(상원) 선거 참패로 이시바 퇴진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포스트 이시바’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농림수산상은 이날 오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이시바 정권에서의 첫 장관급 인사의 참배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郎) 전 총리의 차남인 그는 보수 성향 인사로 부친처럼 그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이어왔다.
지난 총재 선거에서 마지막까지 이시바 총리와 경합을 벌였던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은 물론 지난 총재 선거에 출마했던 고바야시 다카유키(小林鷹之)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도 이날 참배 행렬에 동참했다. 이시바 총리는 이날 공물을 봉납했다.
이날 이어진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한국 외교부는 대변인 명의로 된 논평에서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했다. 외교부는 “일본의 책임있는 지도자들이 역사를 직시하고 과거사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진정한 반성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촉구한다”면서 “이는 양국간 신뢰에 기반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위한 중요한 토대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