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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내 업체 절반 도산" 경고…석화 구조조정 결국 정부 칼 뺐다

중앙일보

2025.08.16 18:34 2025.08.16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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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 업체가 밀집해 있는 전남 여수시 여수국가산업단지에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다. 연합뉴스

위기에 빠진 석유화학업계의 구조조정이 정부 주도로 속도를 낸다. 민간의 자발적인 사업 재편 속도가 더디자, 자칫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정부가 전면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4일 “석유화학산업이 상당히 큰 위기"라며 “사업 재편, 설비 조정, 기술 개발 등을 아우르는 종합 대책을 신속하게 마련하도록 해 주시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같은 날 “석유화학산업 구조개편에 대한 정부 방침을 이달 중으로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한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업체 간 이해관계 조율의 어려움과 인위적 구조조정에 대한 부담으로 정부가 빠른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며 “한화와 DL그룹의 합작회사인 여천NCC가 부도 위기에 몰리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정부가 결국 칼을 빼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의 공급 과잉 여파로 국내 석유화학업계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다. 중국은 2020년대 들어 ‘에너지·화학 자급률 70% 이상’을 목표로 대형 나프타분해센터(NCC)와 프로판 탈수소(PDH) 설비를 공격적으로 신·증설했다. 그 결과 2014년 1950만t이던 에틸렌 생산 설비 규모가 지난해 5274만t으로 확대했다. 10년 만에 덩치를 3배로 불렸다. 이 여파로 국내산 수요가 줄면서 석유화학업체가 밀집한 여수국가산단의 공장 가동률은 2021년 87%에서 지난해 78.5%로, 올해는 60%대까지 떨어졌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여천NCC지회 조합원이 12일 서울 중구 한화빌딩 앞에서 '한화그룹의 여천NCC에 대한 신뢰와 지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한화그룹과 DL그룹이 합작해 설립한 여천NCC는 최근 석유화학 업황 악화로 부도 위기를 맞았다. 한화그룹은 추가 지원을 통해서라도 여천NCC의 디폴트는 막겠다는 입장인 가운데 한화솔루션이 지난달 말 이사회에서 여천NCC에 대한 1천500억원 규모의 추가 자금 대여를 승인한 바 있다. 연합뉴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구조조정이 없으면 3년 내 국내 석유화학 업체 절반이 도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재계 10대 그룹 중 LG·롯데·한화·DL 등 6곳이 석유화학을 주력 계열사로 두고 있어, 위기가 그룹 전체로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 12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내놓고 법제 정비, 금융·세제 지원 등을 통해 기업의 자율적 구조조정을 유도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주요 업체들이 비핵심 사업 매각 등 자산 경량화에 나섰지만, 업계는 “이대로는 불황을 넘기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지난달부터 문신학 산업부 1차관이 10여 개 석유화학 기업 대표와 물밑 협의를 진행하며 사업 재편 방향을 논의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의 방향은 ①정부가 마련한 구조개편안을 토대로 기업 간 ‘빅딜’을 추진하고, ②부실사업 정리와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 전환 등과 함께 정책·재정·규제 완화를 패키지로 적용한 조선업·일본 석유화학업계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며, ③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업에는 세제·금융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무임승차 기업은 철저히 배제하는 ‘당근과 채찍’ 방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사자인 기업들이 각자 중장기 사업계획과 손익계산을 통해 자발적으로 사업을 정리ㆍ조정하거나 인수ㆍ합병(M&A) 등 ’결단‘을 내리면, 사업 재편이 신속히 이뤄지도록 정부가 각종 금융ㆍ자금ㆍ세제 등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또 기업들의 신속한 사업 재편을 촉진하기 위해 합작법인 설립, 신사업 M&A 추진 시 기업결합심사가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공정거래위원회 컨설팅을 지원하고, 사업 재편을 위한 정보 교환에 대한 사전 심사를 간소화하는 등 규제 문턱을 낮춘다.


특히 전문가들은 조선업과 일본 석유화학의 구조조정 사례처럼 ▶사업·설비의 과감한 통폐합 ▶기업 간 ‘빅딜’ ▶고부가가치 산업 전환 ▶정부의 정책적 지원 ▶이해관계자 간 고통 분담이 병행돼야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한국 조선산업은 2010년대 후반 수주 절벽기를 자산 매각, 사업 조정 등 자구 노력과 구조조정을 통해 극복했고, 이후 한·미 관세협상의 핵심 업종으로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당시 구조조정 과정에서 중형 조선사는 컨테이너선 등 손실 분야를 정리하고 유조선·특수선에 집중했으며, 대형사는 LNG선·친환경 선박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전면 개편했다. 이로 인해 다수 기업이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글로벌 시장 재진입에도 성공했다.


김주원 기자

일본 정부 주도의 석유화학 구조조정 사례도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 2014년 11월 일본 경제산업성은 ‘석유화학산업 시장 구조에 관한 조사 보고서’ 발표하면서 “6년 내 에틸렌 생산량 30% 감축”을 목표로 제시했다. 아울러 공정거래법 예외 적용 등 규제 완화로 기업 간 ‘빅딜’ 지원을 지원했다. 이러한 정부 주도 전략의 결과로, 에틸렌 설비는 3년 만인 2017년까지 약 80만t 감축됐고, 각 분야의 선도 기업이 탄생했다.

주철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11일 발의한 ‘석유화학 특별법’에서도 정부 주도의 사업재편 방향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합병·분할·설비축소 등 사업 재편에 대한 세제 공제 및 과세 이연 ▶연구개발(R&D)·설비투자 등에 보조금 지원 ▶전기요금 감면 ▶생산시설 신·증설·폐쇄 절차 간소화, 환경규제 특례, 기업 간 생산량 감축 등 조정 시 공정거래법 적용 예외, 자발적 재편이 어려운 기업의 경우 정부가 직접 재편을 유도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달 중 발표될 대책에는 개별 기업의 구체적인 구조조정 계획ㆍ수치도 제시될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공급 과잉에 대응하기 위한 생산 물량 조절이 불가피한 만큼, 업계 논의를 바탕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생산 설비 가동 계획이 정리될 전망이다.

사업 재편이 성공하려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의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이 우선이다. 김정관 장관도 “‘무임승차’하는 기업은 범부처가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조선업 방식의 전면적인 구조조정은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 석유화학업계 전문가는 “석유화학의 경우 조선업과 달리 10여 개 대기업이 수십 가지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 기계적인 통폐합은 사실상 무리가 있다”고 진단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석유화학 위기 신호는 이미 수년 전부터 감지됐지만 정부 대응이 너무 늦었다”며 “공정거래 규제 완화 등을 통해 민간 주도의 자율 구조조정이 이상적이나, 지금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공급과잉 설비 축소와 고부가 정밀화학 전환을 신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김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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