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튼우즈 체제는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열린 ‘연합국 통화금융 회의’에서 출범했다. 이 체제를 시작으로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출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까지 국제무역 규범과 질서 재편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관세·비관세 장벽을 허무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무역 의제를 규범에 담아 국제무역 질서의 뼈대를 세운 설계자였다. 그런데 이런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입에서 “WTO가 지배하는 현재의 이름 없는 세계질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선언이 나온 것은 아이러니다.
미, 후속 협상 때 환율 또 꺼낼 듯
디지털 서비스 개방 압력도 예상
일본 등 경쟁국과 협력 강화해야
트럼프 2기 출범 200일 동안 미국은 지난 30년의 WTO 체제에서보다 더 많은 해외 시장 개방을 이뤘다고 자찬하며 ‘턴베리 시스템’을 앞세워 WTO 시대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런데 WTO에 작별을 고한 미국이 정작 지난달 타결한 인도네시아와의 무역 합의 공동성명에서는 WTO 협정 이행을 외쳤다. 새로운 질서를 주장하면서도 필요하면 거리낌 없이 과거의 틀을 끌어다 쓰는 모습이야말로 뉴노멀의 현실이다.
이런 격변 속에서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이후 미국과의 후속 추가 합의를 준비하는 한국 정부는 몇 가지 과제를 점검할 때다. 하반기 수출 전선은 숫자로나 물량으로나 상반기의 ‘트럼프 관세 폭탄’ 여파를 고스란히 맞을 전망이다. 이 와중에 환율은 매우 민감한 주제로 떠오를 것이다. 트럼프 1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때도 환율 문제가 거론됐듯이 추가 협상에서 미국이 또다시 환율 카드를 꺼낼 가능성을 대비해야 한다.
둘째 변수는 디지털 서비스 관련 무역장벽이다. 초기 트럼프의 시선은 관세와 상품 무역을 더 주목했지만 서비스 무역, 특히 디지털 부문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분야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지난 40년간 ‘국가별 무역장벽(NTE) 보고서’를 통해 미국 기업이 직면한 각종 무역장벽을 지적해 왔고, 이제는 이런 무역장벽을 허무는 동시에 관세 카드로 미국을 지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의 협상에서는 디지털 분야의 망 사용료 폐지, 인도네시아와는 전자적 전송에 대한 무관세에 합의했다. 하지만 한국에도 폐지 요구서가 날아올 공산이 큰 디지털 분야 비관세장벽 중 일부는 산업 보호막을 거두는 동시에 도약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외부 경쟁은 더 치열해지겠지만, 그 압력 속에서 더 정교한 기술 발전과 혁신을 도모할 수 있기에 사려 깊은 대응이 필요하다.
싱가포르 다음으로 FTA를 많이 체결한 한국은 FTA 방식과는 결이 다른, 처음 보는 ‘합의 형식’의 함정에 유의해야 한다. 미·영 무역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일반 조건(general terms)’ 형태로 공개됐고, 미-인도네시아 무역합의는 ‘공동성명’으로, EU와의 합의는 백악관 ‘팩트 시트’를 통해서만 내용이 파악된다. 트럼프는 앞으로 모든 협정을 ‘시장 개방, 투자·구매 약속 이행’이라는 조건부로 만들고, 더딘 분쟁해결절차를 지닌 WTO 대신 스스로 이행 여부를 평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이행 위반으로 판단할지, 그 결과를 어떻게 적용할지가 불투명하다. 협상을 잘 마무리했더라도 이행 과정 중에 예기치 못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선 생소한 합의 형식일수록 절차적 명확성과 평가의 투명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25% 관세를 15%로 인하하면서 최혜국대우(MFN) 관세 포함 여부로 큰 곤욕을 치를 때 한국은 한·미 FTA 덕분에 상대적으로 무난히 방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 일본을 경쟁 상대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트럼프식 압박의 파고를 버티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이 살길이다. 미국의 압력을 받는 많은 국가가 협력과 무역 다변화를 모색함에 따라 그간 진도가 나가지 않던 기존 FTA 체결국들과의 업그레이드 협상에도 새로운 동력이 생길 것이다. 대한민국이 공들여 쌓아 올린 FTA 네트워크 공고화와 확대를 다시금 정밀 점검할 시기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CPTPP)’ 가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통상 전략의 다음 스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