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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김성수 사단' 시대 열렸다…'좀비딸' '야당' 감독 배출

중앙일보

2025.08.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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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좀비딸'의 필감성 감독(왼쪽)이 자신의 스승 김성수 감독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NEW
452만 관객(18일 현재)을 모으며 올해 최고 흥행 영화가 된 '좀비딸', 그 전까지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 자리를 지켜온 '야당'(337만 관객). 두 영화의 공통점은 뭘까.

'좀비딸'의 필감성(48) 감독, '야당'의 황병국(57) 감독 모두 '서울의 봄' 김성수(64) 감독의 예전 연출부를 거친 제자 출신이다. 특히 정우성·장쯔이 주연의 사극 영화 '무사'(2001) 촬영 때 중국 사막의 모래 먼지를 삼키며 고생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무사' 촬영 현장은 유해진·정석용 등 조단역 배우들이 영화에서 빨리 죽어 한국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정도로 혹독한 환경이었다. 그 때 김 감독과 동고동락했던 두 제자 감독이 올해 할리우드 외화의 파상 공세 속에서 함께 흥행작을 일궈내 한국 영화의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다.

정우성, 장쯔이 주연의 영화 '무사'의 한 장면. 사진 싸이더스
정우성, 장쯔이 주연의 영화 '무사'의 한 장면. 사진 싸이더스
김 감독은 '좀비딸', '야당'의 GV(관객과의 대화)에 나서는 등 제자들의 작품을 지원 사격하고 있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좀비딸' GV에 앞서 김 감독과 필 감독을 함께 만났다.

김 감독은 "사춘기 딸, 고양이, 씩씩한 어머니가 영화에 나오는 걸 보고, 필 감독 자신의 삶이 투영돼 재미있는 영화가 나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환(조정석)의 화법, 냉소적 유머가 필 감독과 비슷하다"고 하자, 필 감독은 "어떻게 아셨냐. 아내도 똑같은 말을 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무사' 촬영 때 대학생(동국대 영화학과)이던 필 감독은 영어,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연출부에 발탁됐다. 그는 스크립트, 통역 뿐 아니라 편집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김 감독은 "원래 편집을 혼자 하는 스타일인데, 당시 필 감독의 재능을 발견해 함께 편집했다"며 "이후 '영화계에 천재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며 차승재 영화제작자, 유하 감독이 그와 함께 작업했다"고 말했다.

영화 '무사'(2001) 촬영 현장의 김성수 감독. 뒤로 보이는 이가 '좀비딸'을 연출한 필감성 감독이다. 사진 싸이더스
범죄 스릴러 '인질'(2021)로 성공적인 장편 데뷔를 한 필 감독은 "감독님은 '무사' 촬영 때 매 쇼트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파고 들며,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며 "영화에 대한 태도를 배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돌아봤다.

김 감독의 첫 천만 영화 '서울의 봄'(2023)을 보고 "내가 데뷔한 날보다 더 기뻤다"는 필 감독의 말에 김 감독은 "영화를 보는 눈이 굉장히 깐깐한 필 감독으로부터 장문의 축하 문자를 받고 정말 행복했다"고 답했다. '서울의 봄'을 보고 화가 난 관객들이 황정민이 고초를 겪는 영화 '인질' 재개봉에 열광했다는 얘기에 둘은 파안대소했다.

영화 '야당'을 연출한 황병국 감독(왼쪽)이 자신의 스승 김성수 감독(오른쪽)과 함께 GV(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김 감독과 황 감독의 인연은 훨씬 더 깊다. 1986년 고(故) 유현목 감독이 만든 영화 모임에 각각 대학원생, 고교생으로 참가한 둘은 '태양은 없다'(1999)부터 감독과 연출부로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황 감독이 일본에서 영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무사'에선 연출부 일은 물론, 여솔(정우성)이 던진 창에 이마를 맞고 즉사하는 몽골 병사 역을 맡기도 했다.

전화로 만난 황 감독은 김 감독으로부터 리더의 자세를 배웠다고 했다. "대작 영화를 연출하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과 돌발 변수가 생기는데 감독님은 늘 맨 앞에서 독려하면서 끝까지 이끌고 간다"면서 "내가 감독을 해보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겠더라. 전형성의 늪에 빠지지 않고 늘 다른 걸 시도하는 모습도 내게 큰 공부가 됐다"고 말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 육군 소장(왼쪽)으로 출연한 황병국 감독.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부당거래'(2010)에 국선변호사로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황병국 감독. 사진 CJ ENM
'서울의 봄'에 육군 소장으로 출연했던 황 감독에 대해 김 감독은 "내 편집실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아이디어와 능력을 잘 끌어내는 연출가"라고 평가했다.

황 감독은 '특수본'(2011) 이후 오랫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했지만, '베테랑'(2015) 등에 조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필 감독은 황석영 작가 소설 원작의 '무기의 그늘' 제작이 무산된 아픔에도 좌절하지 않고, 단편 영화를 연출하며 내공을 쌓았다.

김 감독은 "두 감독이 인내심을 갖고 공백기를 버텨냈기에 지금의 영광이 있는 것"이라며 "쫀쫀한 범죄 스릴러('야당'), 재미있는 가족 코미디('좀비딸')로 한국 영화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고 말했다. 황 감독은 "'무사' 촬영 때 다른 선배들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현장을 지켜낸 인내력이 필 감독의 성공을 이끈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돌이켰다.

영화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서울의 봄' 촬영 현장의 김성수 감독(오른쪽).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황 감독과 필 감독은 '김성수 사단'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김 감독은 "오히려 내가 후배 감독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 감독의 촬영 현장은 엄격하고 혹독하기로 '악명' 높지만, 그를 거쳐간 감독들은 모두 스승과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로 스승보다 먼저 천만 감독이 된 추창민 감독('태양은 없다' 연출부), '범죄도시'(2017)·'카지노' 시리즈(디즈니+)의 강윤성 감독('영어완전정복' 연출부), 넷플릭스 영화 '84제곱미터'의 김태준 감독('감기' 연출부)도 김성수 사단으로 분류된다.

천만 영화 '파묘'(2024)를 연출한 장재현 감독은 황병국·추창민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김 감독과 연을 맺으며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김 감독 제자의 제자인 셈이다.



정현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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