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미국의 중재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뒤 독립한 두 나라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지역을 두고 지난 37년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는데 마침내 적대 관계를 끝내기로 합의한 뒤 두 손을 잡은 것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안에 있지만, 아르메니아 주민이 살고 있었고 양국은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1988년부터 총칼을 겨눴는데 2023년 아제르바이잔이 완전히 점령했고 아르메니아 주민은 모두 아르메니아로 이주했다.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땅이 됐는데도 양국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불편한 관계였다.
37년간 총칼 겨눈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적대 관계 끝내기로
협정 중재한 미국, 이란 북쪽 ‘장게주르 회랑’ 99년간 통제권 확보
이란 서쪽에선 이스라엘이 ‘다윗의 회랑’ 가시화로 이란 압박 강화
국제 회랑은 무역로이면서 경쟁국 견제 수단, 전쟁 불안감 높아져
그런데 러시아의 뒷마당이라고 할 이 두 나라가 항구적인 평화에 합의하도록 미국이 중재했다. 아르메니아는 미국에 장게주르 회랑(Zangezur Corridor)을 무려 99년간 조차했다. 장게주르는 아제르바이잔과 나흐츠반을 잇는 아르메니아 영토다.
나흐츠반은 아제르바이잔의 자치공화국인데 아르메니아가 사이에 끼어 있기에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르메니아를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동안 양국 사이가 전시 상태와 같고 아르메니아가 길을 내주지 않아 연결할 수 없었다. 이번에 아르메니아가 자국 슈니크주의 장게주르 회랑 43㎞ 개발·통제권을 미국에 넘김으로써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나흐츠반 길이 뚫린 것이다. 그리고 회랑 이름을 ‘국제 평화와 번영을 위한 트럼프의 길(Trump Route for International Peace and Prosperity)’로 지었다.
장게주르 회랑의 전략적 중요성 장게주르 회랑은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의 숙원사업이었다. 2023년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래 아르메니아에 장게주르 회랑 건설을 계속 압박했다. 이 길이 열리면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나흐츠반을 거쳐 튀르키예의 카르스까지 연결된다. 아제르바이잔은 굳이 이란을 거치지 않고 튀르키예·유럽까지 이어지고, 튀르키예는 바쿠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카자흐스탄 등 튀르크어 사용 형제국까지 이어져 범튀르크 세계의 맏형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장게주르 통관료를 받겠지만, 그 대신 영토 통제권을 상당 부분 잃기에 회랑 연결에 반대했다가 친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미국이 컨소시엄을 건설해 장게주르 회랑을 개발하고 약 1000명 규모의 민간 보안 용역회사가 지역을 통제한다. 회랑 수입의 40%는 미국이 갖는다고 한다.
이란은 곤혹, 러시아는 불편 가장 곤혹스러운 나라는 이란이다. 이란은 북쪽으로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두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장게주르 회랑이 이어지면 이란은 아르메니아로 이르는 길이 막힐 가능성을 염려한다. 아르메니아를 거쳐 조지아를 통과해 흑해로 이어지는 길이 막힐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43㎞에 이르는 장게주르 회랑은 이란과 맞닿아있는데 이곳을 적성국 미국이 통제한다는 사실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란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국의 평화는 환영하지만, 외국 세력의 개입은 남부 캅카스의 안정을 해친다고 지적하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장게주르 회랑을 막겠다고 불편함을 토로했다. 이란과 사이가 좋았던 아르메니아가 이란과 함께 회랑 건설에 부정적이었다가 미국과 손을 잡은 것이 불쾌하다. 그런데 회랑을 막을 뾰족한 수가 있을까? 사실상 없다.
장게주르 회랑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이란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라스 회랑 건설을 논의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스강을 따라 이란 영토에 길을 내어 나흐츠반으로 가는 빠른 길을 만드는 계획이다. 현재 아제르바이잔~이란~나흐츠반을 잇는 길보다 더 빠른 통로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이 보기에 아라스 회랑보다는 장게주르 회랑이 훨씬 더 안정적인 길이다. 아라스는 이란이 강짜를 부리면 대책이 없는 반면에 장게주르는 미국과 서로 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화해를 환영하는 러시아는 이란과 달리 장게주르 회랑에 크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내심 불편하다. 미국의 등을 타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세력을 확장할 가능성을 예의주시한다. 지역 전문가들은 만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나토와 손을 잡을 기미라도 보이면 제2의 우크라이나 사태가 남부 캅카스에서도 재발할 수 있다는 분석을 조심스레 내놓는다.
이스라엘엔 ‘기회의 창’ 열려 아제르바이잔과 우호 관계인 이스라엘은 장게주르 회랑 건설을 잔뜩 기대한다. 이란의 북쪽을 장악하는 기회의 창이 더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때문에 이란은 같은 시아파 무슬림이 다수여도 아제르바이잔이 영 불편하다.
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과 군사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유사시 아제르바이잔에서 이란을 공격할 방도를 모색한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이란과 이스라엘이 공방전을 벌일 때 이란은 아제르바이잔 방향에서 이스라엘의 미사일이 날아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난 6월 13일 발발한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드론이 아제르바이잔에서 발진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란에서 보면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물론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그런데 이제 장게주르 회랑을 미국이 관리하면 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란과 친한 아르메니아에서도 이란을 감시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이란의 ‘시아 초승달’ 무력화 이스라엘의 이란 옥죄기는 장게주르 회랑만이 아니다. 친이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후 이스라엘은 시리아 남부로 세력을 확장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북동부를 장악한 쿠르드 반군 지역을 거쳐 이란과 국경 지역인 이라크 쿠르드 지역까지 이르는 이른바 ‘다윗의 회랑’을 서서히 완성해가고 있다. 즉 이란의 북쪽으로는 장게주르 회랑, 서쪽으로는 다윗의 회랑으로 이스라엘의 이란 포위망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다윗의 회랑은 호사가들의 말로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용어다.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들이 꿈꾸던 ‘대(大)이스라엘’ 건설의 희망으로 요르단·레바논·시리아·이라크를 포함한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주로 쓰던 말인데, 현재 이란 옥죄기 전략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이란의 ‘시아 초승달’이 사실상 무기력해지면서 수세에 몰렸던 이스라엘이 적극적인 공세로 상황을 전환해 다윗의 회랑으로 이란을 압박하는 셈이다.
레바논의 정치분석가 이브라힘 마지드는 남부 캅카스의 장게주르 회랑과 북부 이라크의 다윗의 회랑이 “새로이 재편되는 국제 무역과 에너지 운송 흐름뿐 아니라 이란과 벌일 미래 전쟁의 전략적 지형”이라고 평가한다. 마지드에 따르면 장게주르 회랑은 “튀르키예와 이스라엘, 서구 에너지 기업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이란을 우회하면서 이란의 동서 연결 고리를 끊어 동서 실크로드의 지정학적 가치를 약화한다”고 한다. 또 이란 서부 전선의 뒷문을 노리는 다윗의 회랑은 “팔레스타인을 거쳐 요르단·시리아를 지나 이라크로 이어지는 신생 육상 노선으로 물류와 군사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다.
지정학적 의미 커진 국제 회랑 현재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히 건설되고 있는 회랑은 국제 질서의 변화를 반영한다. 러시아가 추구하는 국제 남북 운송 회랑(International North-South Transport Corridor), 중국의 중앙 회랑(Middle Corridor), 미국의 인도~중동~유럽 경제 회랑(India-Middle East-Europe Economic Corridor) 등 굵직굵직한 길은 무역로이면서 경쟁국을 견제하는 우회로이기도 하다. 장게주르 회랑은 이란이 구상한 아라스 회랑을 막을 뿐 아니라 아라스 회랑과 국제 남북 운송 회랑의 연결을 방해하고 중국의 일대일로를 차단하는 효능까지 보여준다. 인도~중동~유럽 경제 회랑은 이란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무역로가 가능한 많은 국가를 안고 가는 길이 아니라 함께 하기 싫은 나라를 밀어내는 길임을 보여준다. 전쟁이 언제 또 날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에 이르는 길이 하나씩 하나씩 열리고 있는 엄혹한 국제 질서의 현장을 회랑에서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