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이 유예기간 종료 직전 극적으로 타결됐다. 미국이 부과했던 25%의 상호관세는 일본·유럽연합(EU)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투자와 1000억 달러 에너지 수입 등의 대가로 15%로 일괄 인하되었다. 한국은 사상 유례없는 3500억 달러(약 470조원) 규모의 대미투자 약정이라는 ‘초대형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협상타결에는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MASGA)’라는 구호를 내세워 실효성이 큰 1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방안을 제시한 것이 주효했다. 일본·EU의 협상 결과를 참고해 차별화된 대미 투자 방안을 제시하고, 국내적으로 수용이 어려운 쌀과 소고기 수입 확대를 막아냈다.
구체적 후속 방안 수립 지금부터
기술과 인력의 유출 가능성 커져
국내 투자 여건 획기적 개선 시급
정부도 ‘최선’의 결과는 아니지만,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불확실성을 줄여 어느 정도 시장접근 안정성을 확보한 ‘차선’의 결과를 얻은 것으로 자평하고 있다. 상호관세와 품목별 관세에서 경쟁국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지만, 자동차 관세 우위가 사라지는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실질적으로 무력화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CNBC와의 인터뷰에서 대미 투자는 ‘대출’이 아닌 ‘선물’이라고 발언하는 등 우리 정부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점도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관세율, 투자, 수입 규모 등에 대해 숫자를 중심으로 큰 틀의 합의는 이루어졌지만, 구두 합의에 그쳤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구체적인 조건과 후속 세부 협력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지금부터다.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위기가 될 수 있다.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우리 조선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고, 인공지능(AI)·반도체·이차전지·바이오· 원자력발전 등 주요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주도적 위치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에 협상 타결을 전하면서 ‘미국이 소유하고 통제하는 투자’이고 ‘투자수익의 90%를 미국이 보유한다(retain)’고 밝힌 점은 투자 이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을 시사한다. 미국이 원할 때마다 현지 고용, 기술 공개, 공급망 조정 등 추가 조건을 요구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투자 이행이 부진하면 언제든 ‘관세 인상’ 카드가 재등장할 수도 있다. 해외투자 확대는 제조업 공동화, 국내 고용·기술 유출, 산업생태계 단절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기회 포착’과 ‘리스크 관리’를 병행해야 한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은 단순한 시장이득 교환이 아니라, 국제통상 질서의 본질적 재편에 대응하는 출발점이다. 대미 투자가 ‘숫자 채우기’나 정부의 보여주기 실적으로만 귀결되지 않도록, 경제안보, 산업생태계, 국가 경쟁력 관점에서 실질적 성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대미 투자의 거래조건을 재설계하면서 동시에 국내 투자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대미 거래에 ‘이행 담보 장치’(스냅백, 조건부 상응 조치, 분쟁조정 패스트트랙 등)를 요구해야 한다. 현지화와 재투자 조건, 한국 내 제조·고용 효과, 핵심 원천기술 역내 잔존 등 ‘국가 경제 주권’ 담보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전략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국내 기업활동 여건을 악화시키면서 대미 투자를 독려하는 것은 한국 제조업의 르네상스가 아니라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조만간 개최하기로 합의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동맹이 공고해질 수 있다는 기대도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증액, 주한미군 전략 등 안보 분야의 청구서를 들이밀고 추가 투자와 시장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투자, 고용 기여, 전략산업 협력 등에서 한국의 ‘안보 역할’을 데이터에 기반한 ‘직관적이면서 간단한 수치’로 제시하고, 방위산업, 인공지능, 우주·사이버안보 등 미래 안보 분야에서 한·미 간 ‘융합형 분업’ 구조를 선제적으로 제안할 필요가 있다. 임기응변이 아닌 진정한 실용을 위한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 경제는 늘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찾았다. 이번에도 그 길을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