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필자는 외교 현장에서 국제정치의 대변혁을 두번 경험했다. 첫 번째는 1990년대 냉전 종식으로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가 전 세계로 확산 때인데, 당시 대한민국은 안보·경제·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크게 성취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우리는 강대국 정치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무력 사용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중국 등 강대국들은 무력 사용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냉전 종식 이후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를 선도해 온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역할을 등한시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35년의 국권 상실, 한국전쟁 등 강대국 정치 와중에 큰 고난을 겪은 한국인으로서는 위기의식을 갖고 ‘자강’과 ‘연대’의 두 축으로 새로운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 흔들려
기업·정치권·국민 자강 동참하고
일본·호주·나토와 연대 강화해야
자강을 위해서는 기술·경제·국방력의 3대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경제는 2014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처음 돌파한 이후 4만 달러 아래의 박스권에 갇혀 있다. 내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이 촉발한 관세 전쟁으로 경제 성장률이 1%대로 추락하고 있다. 한국의 기술 수준에 대해 하버드대 벨퍼(Belfer) 센터 등 여러 평가 기관이 경보를 울리고 있다. 이런 기술 수준과 경제력으로는 국방력 강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1960년대엔 해외 우수 과학자와 기술자를 유치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해 경제 발전과 국방력 강화를 동시에 추지할 수 있었다. 지금 당면한 안보·경제의 동시다발 위기를 극복하려면 초심으로 돌아가 온 국민이 합심해 자강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업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특히 정치권의 큰 각성과 협조가 필요하다.
국제 정치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강과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미국이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등한시하고 스스로 강대국 정치에 나서자 한국 일각에서는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가 수명을 다한 것으로 여기고, 한국도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실익에 충실한 외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듣게 된다.
이런 주장은 사실 실익을 고려하면 도움이 안 된다. 첫째,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의 가장 중요한 규범이 ‘힘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가 국제 관계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으로서는 법의 지배는 벗어버릴 것이 아니라 안보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다. 둘째, 미국이 수호자 역할을 등한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의 준수를 우방국의 기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미 동맹의 현대화와 발전을 위해서라도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다행히 일본과 호주,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등 미국의 전통적 동맹들은 모두 이런 입장을 유지하고 있고, 그들은 한국과의 협력 강화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가 안보와 경제의 불가결한 기초이며, 강대국들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사적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의 연대 강화는 중국과 러시아, 글로벌 사우스 등 미국 주도의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에 불만을 가진 국가들과의 관계를 어렵게 하기에 한국이 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한국은 기술·경제·군사력의 3대 능력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세계 10위 권의 국가다. 모호한 입장 뒤에 숨을 수 없고, 그러한 입장이 오히려 상대국의 불신을 키운다. 한국이 왜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외교의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국과 러시아, 글로벌 사우스 등과의 지속가능한 관계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필자가 지난 50년간 국제정치를 경험하면서 지금처럼 위기의식을 느낀 적이 없다. 한국경제는 마치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가 반쯤 익은 상태’ 같다는 지적은 경제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당면한 현실에 대한 뼈아픈 비유다. 위기를 자각하고 자강과 연대를 위한 비상한 노력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