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인 구조조정, 현 시점에선 ‘따뜻한 냉커피’ 같이 실현 불가능한 대책 아닐까 싶습니다.”
20일 정부가 발표한 ‘석유화학(석화)산업 재도약 추진 방향’에 대한 석화 업체 임원의 반응이다. 정부 대책의 뼈대는 중국발(發) 글로벌 공급과잉 해소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프타 생산 감축에 나서는 기업에 맞춤형 지원을 하되, ‘무임승차’하는 기업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석화 구조조정을 기업 자율에 맡기되 정부가 ‘당근과 채찍’을 내리는 식이다.
이날 정부와 자율 협약에 참여한 업체는 LG화학·롯데케미칼·SK지오센트릭·한화토탈·대한유화·한화솔루션·DL케미칼·GS칼텍스·HD현대케미칼·에쓰오일 등이다. LG·롯데·한화와 함께 석화 ‘빅4’ 중 하나로 꼽히는 금호석유화학의 경우 나프타분해시설(NCC)을 갖고 있지 않아 자율 협약에서 빠졌다. 협약에 참여한 A 석화업체 관계자는 “대통령이 대책을 채근하는 바람에 급하게 모였다. 자율보다 타율 협약에 가깝다”고 털어놨다.
석화 업계는 자율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였다면 진즉 해결했을 거란 측면에서 회의적이다. B 석화 업체 관계자는 “구조조정도 방향과 강도가 있는데 지금은 한 회사가 주력 사업을 완전히 접든지, 두 회사가 한 회사로 합치든지 하는 식의 ‘죽느냐 사느냐’로 내몰린 상황”이라며 “회사 입장에선 경쟁사와 기싸움을 해야하는 의사결정을 ‘기업끼리 알아서 하라’는 식이라 당황스럽다”고 털어놨다.
각사 사정이 다른데도, 정부는 일단 나프타 감축 목표를 정해 놓고 이에 따르라는 방침이다. 개별 기업 속내는 복잡하다. 석화 업계는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프로필렌 같은 기초 유분을 만드는 ‘업스트림(upstream)’, 기초 유분을 다시 분해해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합성 고무 같은 정밀 화학제품을 만드는 ‘다운스트림(downstream)’으로 나뉜다.
C 석화업체 관계자는 “업스트림·다운스트림에 속한 회사의 입장, 그 중에서도 NCC가 주력인 회사, 모그룹이 정유사를 함께 가진 회사, 자금 여력이 충분한 회사 등 사정이 천차만별”이라고 설명했다.
업체 간 ‘동상이몽’ 상황에서 현재 유력한 구조조정 시나리오는 크게 ▶정유사와 석화 업체 수직 통합 ▶석화 업체 간 NCC 설비 통합 운영 ▶석화 업체별 NCC 설비 폐쇄 등이다. 석화 업계 스스로 하긴 어려운 오래 곪은 문제라, 채찍을 빨리 들어 교통정리를 하지 않고선 해결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D 석화업체 관계자는 “‘너 죽고 나 살자’ 하는 상황인데, 어느 기업이 ‘나부터 죽겠다’고 하겠냐”라며 “연말까지 미룬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아프더라도 정부가 칼을 잡아야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미 지난해 12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통해 각종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석화 업계의 자율적 사업재편을 촉구한 바 있다. 시간만 미뤄졌다는 지적에 대해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석화 업계가 그동안 문제를 외면해왔다”며 책임을 돌렸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룰 세팅(rule setting·규칙 정비)이라고 설명한 대로 뒤늦게 대책의 첫발을 뗀 수준”이라며 “1차 구조조정이 끝나더라도 고부가가치 제품 등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한 정부와 업계의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