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되어야 이런 예속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단순한 인내심이나 집요한 야망일까, 아니면 조금은 미친 걸까?” 김오안 감독의 다큐멘터리 ‘물방울 그리는 아버지’(2021)에는 김 감독이 아버지 고(故) 김창열(1929~2021) 화백에 대해 독백으로 던지는 질문이 나온다. 어떻게 한 화가가 50년 동안 줄기차게 물방울을 그릴 수 있을까? 김 화백의 작품을 보면 아들 뿐 아니라 누구나 품게 되는 질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물방울 화가’ 김창열 회고전을 지난 22일 개막해 12월 21일까지 연다. 작가 작고 이후 국공립 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회고전으로, 미공개 작품 31점을 포함 총 120여 점을 보여준다. 전시는 특히 물방울 회화가 등장하기 이전인 1950년대 중반부터 김 화백이 파리에 정착한 1970년대 초반까지의 창작 과정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물방울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실마리가 여기 보인다.
평안남도 맹산 태생인 그는 열 여섯 살에 홀로 월남해 해방과 분단, 전쟁을 겪었다. 194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휴전 후 제주도 경찰전문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격월간지 ‘경찰신조’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이때 그가 대부분의 작품에 ‘제사’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점이다. 당시 그가 그린 추상화는 총알 맞은 살갗의 상처, 탱크가 짓밟고 간 흔적 등을 연상케 한다. 2016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6·25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다”고 했다. 작가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전시는 그의 작품이 1965~69년 뉴욕 시기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김환기의 권유로 뉴욕 록펠러 재단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에 대한 회의와 문화적 단절로 위기를 경험한다. 이 시기에 이전의 두껍고 거친 화면은 사라지고 매끈한 표면의 기하학적 추상이 나타났다.
이후 파리로 터전을 옮긴 그는 또 한 번 변화를 맞는다. 작가 스스로 ‘창자미술’이라 부른, 인체의 장기를 연상시키는 덩어리에서 점액질이 흘러내리는 듯 표현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현상’ 연작이다.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학예연구사(이하 학예사)는 “당시 작가의 드로잉과 메모를 보면 인간의 폭력성과 신체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1971년 물방울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동안 미술계에선 작가가 파리 외곽 작업실에서 밤새 캔버스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을 보고 그린 것이 물방울 회화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김창열의 물방울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조형 실험과 존재론적 사유 끝에 도달한 결과”(설 학예사)임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1973년 파리에서 연 개인전을 계기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전시는 프랑스 국민 배우 카트린 드 뇌브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와서 볼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 알랭 보스케(1919~1998)는 물방울이 불러일으키는 명상적 힘과 존재론적 통찰에 주목했다. 이후 국내외 비평가들의 시선을 통해 물방울은 단순한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동양적 세계관과 연결되며 생성과 소멸, 찰나의 형상, 변화의 상징이자 ‘덧없음’의 은유로 읽혀왔다.
이번 전시엔 1955년작 ‘해바라기’ 등 초기작이 최초 공개된다. 설 학예사는 “작가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과 함께 살았다”며 “그에게 물방울은 끝내 다 그리지 못한 애도의 일기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시기를 드러내 작가를 새롭게 마주하게 했다는 점에서 큰 성취를 이뤘다.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을 예술로 승화한 작가 김창열이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