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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의 시선] 우리가 알던 미국·중국이 아니다

중앙일보

2025.08.25 08:16 2025.08.2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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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 산업부장
공수(攻守)가 뒤바뀌었다. 미국이 ‘수출하겠다’ 하는데도, 이번엔 중국이 ‘안 사겠다’ 한다. 엔비디아가 중국 수출용으로 만든 저사양 AI 반도체 ‘H20’에 백도어, 즉 미국이 심은 정보유출 통로가 있을 거라는 의심 때문이다. 반도체 자립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다. ‘효율적인 AI’의 대명사가 된 중국 딥시크는 지난 21일 중국산 차세대 AI 칩에 최적화한 신규 AI 모델을 발표했다.

한때는 엔비디아 아닌, 화웨이가 의심받는 처지였다. 화웨이의 통신장비 시장 침투가 심상치 않다고 본 미국 의회는 2012년 화웨이 경영진을 불러내 ‘통신장비에 백도어를 심었는지’ 따졌다. 의심은 쌓이고 쌓여 2018년 미국에서 화웨이 제품 구매 금지령을 내렸고, 그해 말엔 창업자의 딸인 화웨이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캐나다 공항에서 붙잡혀 2년 이상 가택연금됐다. 화웨이의, 중국의 반도체 자립 의지에 트리거를 당긴 건 트럼프 1기 행정부다.

자유시장 질서 배신하는 미국
국가자본주의 한계 고치는 중국
자본·인재 부족한 한국의 길은

그랬던 미국이 국유기업 흔한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연일 터뜨리고 있다. 인텔에 보조금 주는 대신 지분 10%를 받아냈고, 대중 AI 칩 수출을 허가하는 대신 매출의 15%를 기업한테 받는다. 자유 시장경제의 질서를 배신하는 것도, 동맹국에도 요구한 대중 수출통제의 원칙을 훼손한 것도 모두 미국. 요즘 미국은 우리가 알던 ‘그 미국’이 아니다.

동시에, 중국도 우리가 알던 ‘그 중국’이 아니다. 요즘 중국은 공급과잉으로 가격 경쟁이 심각한 전기차·태양광패널·배터리·철강 시장에서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보조금을 거둬들이고 생산량을 줄여 제살깎기식 경쟁을 지양하는 이른바 ‘반내권(反內卷, anti-involution)’ 조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전국 성(省)들이 죄다 AI, 컴퓨팅파워, 전기차 산업을 키워야 하느냐”며 특정 산업으로 자원 집중 문제를 지적했다는 관영 매체 보도도 나왔다. 국가자본주의의 비효율, AI 버블을 조정하고 자원 배분에 효율을 더하겠다는 선언은 ‘제조2025’의 시즌2로도 읽힌다.

이미 중국의 첨단 반도체 생태계는 질적으로도 업그레이드 됐다. 중국 최대 메모리업체 창신메모리(CXMT)는 물론, 무어쓰레드·메타엑스 같은 반도체 유니콘들도 중국 증시에 상장을 준비 중이다. 정부 보조금 아닌 민간 자본시장을 통해 연구개발비를 조달하겠다는 자신감이다. HBM에서 중국이 자립할 날이 더 빨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1, 2대 교역국인 미국과 중국이 이렇게 변한 마당에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의 좌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미 정상회담 직전까지도 대미 투자를 놓고 미국 정부의 전방위 압박이 이어졌다. 한국의 기업 자본이 미국으로 더 빨리 더 크게 빨려 들어간다면 우리 ‘소’(국내 산업과 일자리)는 누가 키워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새 정부의 ‘AI 3대 강국’ 목표를 위해 필요한 AI 100조 펀드는 무슨 돈으로 채울 수 있을까.

정부는 연기금이나 기금채, 재정 등을 동원하고, 부동산에 쏠린 국내 자금을 끌어와 AI 100조 펀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지만 국민 쌈짓돈만으론 한계가 있다. 초고령사회의 숙제가 산적한 가운데 AI에 모든 자원을 다 투입하는 것도 국민은 사실 불안하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자본을 유치해올 수는 있을까. 한국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대통령처럼 관세나 안보 우산을 무기로 윽박지르듯 투자 유치할 수는 없는 처지다. 상법 개정한다고 다 해결될 일도 아니다. 전 세계 무역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산업 공동화를 막으려면 더 많은 글로벌 기업들을 한국에 유치해야 할텐데 현재로선 쉽지 않아 보인다. 기업들의 호소를 끝까지 무시하고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을 통과시킨 한국을 글로벌 기업들이 믿고 들어올 수 있을까. 수십년간 쌓인 국내 산업현장의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려다 매력적인 투자처로서 지위를 잃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중국에 대한 시선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인구는 갈수록 줄고 의대 열풍-공대 기피 현상이 고착된 한국에선 한국인 인재만으론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미 일부 첨단기술 업계에선 “미국의 제재만 아니라면 성공하겠단 열망으로 꽉 찬 중국의 천재들, 중국의 공과대학들과 R&D를 함께 하고 싶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글로벌 톱티어 인재에 대한 깊은 갈증이자, 중국의 추월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한때는 세계의 공장이었지만 어느덧 세계의 브레인으로 올라선 중국을 더 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우리가 살기 위해서다.





박수련([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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