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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30만 파병, 100억 달러 수입…韓 산업화 발판 되다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 ㉕]

중앙일보

2025.08.27 13:00 2025.08.27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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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㉕ 베트남 파병(1964~73)

1966년 9월 베트남으로 떠나는 맹호부대 환송식이 서울공항에서 열렸다. 한 장병의 딸이 아빠에게 입맞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화 움직임이 있던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안보전략에 고도의 안테나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곳의 내전형 이념 분쟁이 한국전쟁과 같은 국제전 양상으로 번질 수 있어서였다. 이승만은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를 기회로 국가재건의 기틀을 다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는 디엔 비엔 푸(베트남 독립전쟁 주요 전장)에서 패하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미국은 직접 참전을 심각히 고려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보고서에 따르면 현지 상황을 주시하던 이승만은 1954년 1월 말 한국군 1개 사단을 베트남에 투입해 프랑스군을 도울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강력히 시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휴전 협상에서 틀어진 백악관과 이승만 간의 신뢰는 깨진 상태였다.

이승만의 파병 제안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차가웠다.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국무장관 덜레스는 이승만을 믿지 못했다. ‘동양의 흥정가’ ‘핑계의 마술사’ ‘공갈꾼’ 정도로 의심했다. 하지만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이승만은 ‘전쟁의 국제화’를 확신했다. 그는 베트남 분쟁을 계속 주시했다. 동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미국과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1955년 남베트남 정부를 공식 인정했고, 군사 교류를 지속했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도 베트남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에게 베트남 파병 의지를 강력히 피력했다. 2인자 김종필은 62년 2월 베트남을 현지 조사한 후 미국이 한국과 공유하고 있는 정보보다 현지 전황이 훨씬 더 북베트남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대통령 특사이자 미국 순회대사인 에브릴 해리만이 방한했을 때 국무총리 송요찬도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언제든지 한국 파병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백악관에 전달했다. 미국은 한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독자적인 군사 교류 가능성을 우려했다. 주한 미국대사 새뮤얼 버거는 청와대를 향해 “양국 간의 모든 군사 교류는 미 정부와 주베트남 미국 군사고문단의 허락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파병 한국군 6000명 가까이 전사
19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채명신(앞줄 왼쪽에서 둘째) 주월 한국군사령관의 안내로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중앙포토]
왜 이승만과 박정희는 미국도 주저하는 베트남 파병에 적극적이었을까? 60년대 초까지 한국은 미국 동맹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받은 국가다. 그러나 원조는 일종의 마약과 같았다. ‘원조의존형 경제’의 한계였다. 임시방편으로 정부 재정은 유지했지만, 산업구조 전환은 상상할 수 없었다. 정치·사회 불안의 핵심인 실업률은 60년대 초 15%(도시권 기준)에 달했다. 미국의 우호적인 태도도 곧 실망으로 변했다. 이승만과 장면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은 미국의 군사·경제 무상원조는 급격히 하락 중이었다.

61년 3월 11일 주한 미 대사가 CIA 의장을 통해 케네디 대통령에게 전문을 보냈다. “장면 정부는 한국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어떤 역량도 보유하지 않았으며, 정치·경제적 위기의 도래는 명확하게 예측됩니다. (중략) 공무원의 독직과 부패, 사기행위가 횡행하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원조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권력을 쥔 박정희를 새로운 상대로 만나게 됐다. 5·16 직후 백악관에서 파견한 한국조사단은 기밀 귀국보고서(6월 5일자)에서 “기회주의적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 (중략) 그들은 국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미국은 이들이 건설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케네디에게 보고했다.

당시 미국은 미군을 포함한 다국적군 캠페인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박정희 정권의 자발적인 파병 의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다국적군 캠페인에 대한 동맹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국군 파병에 의외의 걸림돌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국민 사이에 누적된 ‘반중 정서’였다. 베트남의 ‘천적’인 중국인과 한국인의 유사한 외모가 문제였다. 박정희는 운이 좋았다. 미국에 다급했던 한·일 외교 정상화를 지연하면서 한국군 파병의 가치를 증대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반전주의자인 케네디 암살 이후 권력을 승계한 존슨 대통령은 전쟁 직접 개입을 통한 해결을 주장해 온 터였기에 파병 협상의 주도권은 약소 동맹인 한국으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1966년 8월 30일 백마부대 1진이 부산항을 출발해 베트남으로 향했다. 미군 수송함에 오른 장병들이 시민들의 환송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1964년 비전투병력을 시작으로 65년 이후 10년간 파병한 한국군은 약 30만명에 이른다. 그중 6000명에 가까운 군인이 전사했다. 북한의 남침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 최정예 전투 병력 파병이 가능했을까. 또 미국은 왜 이를 최종 허락했을까. 미국 NSC 소속 한국조사팀이 61년 6월 5일 케네디에게 보고한 비밀보고서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한국 정규 병력을 감축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적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한국의 안보를 절대 도외시하지 않는다는 증표가 필요합니다. 이 계획의 실행은 이미 비무장지대에 배치한 전략핵의 증가를 전제로 해야만 합니다.”

1950년대 후반, 전략핵의 전쟁 억지 효과를 고려한 미국은 당시 한국의 안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베트남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0년 제임스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을 논의한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보다는 경제적 이익 때문에 참여했다”고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전략핵 배치로 대북 군사억지력이 확보된 상황에서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대외전략은 국가 경제 재건과 성장이 최우선이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굳어져
박정희 정부는 파병 과정에서 고도로 정밀하고 체계적인 협상을 벌였다. 미국의 보상이 소극적일 때 최전선의 한국군 철수설을 의도적으로 퍼뜨렸다. 또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베트남전 참전 후 전역한 전투병들을 용병으로 재투입하는 협상도 시도했다.

베트남 파병 대가 차관 사용처는?
박정희 정부는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권을 계속 잡았다. 그때 얻어낸 경제적 대가는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 있던 한국경제의 산업화 과정 전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파병 관련 공공차관으로 5억2250만 달러를 확보하고, 이를 국내 사회간접자본에 집중 투자했다. 파병 관련 상업차관도 2억4000만 달러 규모였다. 1970년대 한국 수출산업의 중심이 된 중화학공업 부문의 설비투자에 활용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도 쓰였고, 미국으로부터 토목기술 지원도 받았다. 또 ‘PL-480’ 무상원조 프로그램(미국 내 과잉 생산 농산물을 지원)에 따라 한국에 제공된 면화는 약 1억7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섬유류 수출을 통한 한국경제 성장의 기반을 제공했다.

이른바 ‘베트남 재벌’의 성장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소규모 건설기업이던 현대는 파병협상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항만토목·도로건설 기술을 무상으로 전수받아 중동 진출의 기술 기반을 닦았다. 지금은 해체된 대우는 섬유 수출 사업에서 시작해 점차 건설·중공업·금융 분야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해운업 기반의 한진이 국내 최초 민항 허가를 얻어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베트남 협상의 결과다.

대내외 경제 문제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베트남 삼각무역(일본으로부터 원자재 및 반가공품들을 수입, 단순 재가공해 베트남에 수출하는 무역구조)이 활발해질수록 한국 경제의 일본 의존도는 높아졌고, 대일 무역수지 적자 폭도 커졌다. ‘베트남 재벌’의 특혜성 다각화는 훗날 대형 재벌 중심의 한국경제 구조를 고착화했다. 그러나 무역과 비무역 수입 그리고 파병 군인의 송금으로 벌어들인 100억 달러의 외화와 무역시장 개척, 산업기술 확보는 현재의 대한민국 모습을 가능케 한 트리거였음이 분명하다. 박정희 정부 때 비서실장과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고 이동원 장관은 과거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후원국 지위가 퇴색하고 있다고 느낀 실용주의적 관료들은 베트남 전쟁이 국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출시장일 뿐만 아니라 실업률을 줄일 수 있는 노동 수출시장이라는 점에 큰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다. 또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달러를 직접 조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유일한 경로라는 점에서도 의견이 일치했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다음은 ‘7·4 남북공동성명’ 편입니다.

최동주 숙명여대 교수 (글로벌거버넌스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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