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협력은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미관계 발전을 위해서라도 한일관계도 어느 정도 수습돼야 합니다.”
25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도중 이재명 대통령이 한 말이다. 필자는 귀를 의심했다. 화면을 끄고 음성만 들으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착각이 들 만큼 보수 정부 입장과 싱크로율이 100%였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탓에 일본과 잘 지내기 어렵나요”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질문에도 이 대통령은 “대통령께서 한·미·일 협력을 중시하시기에 일본과 미리 만나 대통령께서 걱정할 문제를 정리했습니다”고 답했다.
보수 닮은 이 대통령 워싱턴 발언
반일 구호서 현실주의로 급선회
좌파·중국 눈치 말고 약속 지켜야
보수 정권 대통령이 이 말을 했으면 더불어민주당은 “미국에 잘 보이려고 매국적인 위안부 합의를 다 받아줬다. 할머니들을 팔아먹었다”고 맹공했을 거다.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의 브리핑은 정반대였다. “오직 국익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한 대통령에게 감사합니다.”
필자는 이 대통령의 발언을 환영한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당연한 말을 한 것이라서다. 그런데 왜 민주당은 자신들의 대통령이 당연한 말을 하면 환호하면서, 남의 당 대통령이 똑같이 당연한 말을 하면 ‘토착 왜구’라고 물어뜯는가. 이러니 민주당의 반일은 선택적 반일이요, 편가르기용 위선일 뿐이라는 욕을 먹는 것이다.
사실 ‘친일’ 이라면 민주당의 역사가 더 화려하다. 1989년 1월 9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한 히로히토 일왕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을 찾아 절한 유일의 정치인이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DJ)이었다. 히로히토는 일제의 조선 침략 책임자다. 그의 통치 아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고문과 살해를 당했고, 꽃다운 나이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 히로히토 빈소에서 DJ는 허리 굽혀 애도했다. 경향신문 카메라에 찍혀 보도까지 됐다. 그런데 이 사실은 웬일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민주당에서 이 얘기를 꺼리기 때문일 수 있다. 만일 당시 보수정당 지도자가 히로히토 빈소를 찾아 절했다면 민주당은 두고두고 그 사실을 소환하면서 보수정당 친일파 몰이에 써먹었을 공산이 크다.
필자는 DJ의 일왕 조문을 잘한 일로 본다. DJ는 일본의 비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현실주의 대일 노선을 걸은 거인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보수 정부들이 ‘왜색’이라며 금지했던 일본영화·가요를 개방했다. 지금 서울 거리를 뒤덮은 일본어 간판들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보수 대통령이 이런 조치를 했다면 민주당은 어떻게 나왔을까. 안 봐도 훤하다.
DJ는 이런 과감한 ‘친일’ 조치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의 마음을 얻으면서 한·일관계의 표준이 된 ‘신 한일선언’을 끌어냈고, 일본은 DJ를 밀어주는 뒷배가 됐다. 햇볕정책을 불신하던 미국의 마음을 돌리려면 대일관계부터 다져야 한다는 게 DJ의 전략이었고 그것은 적중했다. 욕먹을 것 각오하고 히로히토를 조문한 행위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김대중은 히로히토 개인이 아니라 일본을 향해 절을 했다. 그게 국익에 도움 된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과 민주당은 대한민국을 책임진 집권세력이다. 야당 시절 부르던 죽창가는 내려놓고, “기존 입장을 180도 뒤집었다”는 욕을 먹더라도 DJ처럼 현실주의 외교를 펼칠 책임이 막중하다. 이 대통령의 워싱턴 발언을 보면 그런 책임감을 가진 것으로 보여 다행이다. 이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서도 “이제는 한국도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에 어긋나게 행동·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며 ‘안미경중’ 노선을 이어갈 수 없다고 했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당장 여권 안팎의 친중·반미 세력은 대통령의 외교 노선을 뿌리째 뒤흔들려 기회를 노릴 것이다. 중국도 “한·중 관계가 제3국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외교부 대변인)라고 포문을 열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하나만 놓고도 대통령은 중국의 엄청난 압박을 받을 게 뻔하다. 미국이 2020년 이란군 1인자 솔레이마니를 제거할 때 쓴 ‘참수’ 드론 MQ-9 리퍼가 올해 한미연합훈련 현장에서 목격됐다는 소문이 있다. 평양은 물론 베이징도 뒷목이 당길 수밖에 없어 이 대통령 흔들기에 전력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천명한 대로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근간으로 입체적 외교를 펼쳐야 한다. 일본 문화 개방, 이라크 파병, 한미 FTA는 죄다 친일·친미 비난을 무릅쓴 진보 대통령들의 결단으로 이뤄졌고, 이는 대한민국이 글로벌 10위권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데 크게 기여했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