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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방중, 노동신문에도 게재…북·중 관계 개선 공식화

중앙일보

2025.08.29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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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내용 매체인 노동신문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다음달 3일 중국 전승절(戰勝節·항일전쟁 및 반 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대회) 행사 참석 소식을 29일 1면에 보도했다. 주민들에게까지 최고존엄의 동선을 즉각 알린 건 러시아 밀착 일변도에서 벗어나 전통적 우방인 중국에도 다시 적극적으로 공을 들이겠다는 외교 노선의 전환을 선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앙포토

노동신문은 이날 1면 제호 아래 배치한 상자형 기사를 통해 김정은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에 따라 중국인민의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쑈(파시스트) 전쟁 승리 80돌 기념행사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곧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시게 된다"라고 보도했다. 전날 중국 외교부와 북한의 대외용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의 방중 사실을 거의 동시에 공개했다. 북한이 대내외에 김정은의 방중을 발표한 만큼 곧 중국 출발 소식과 전승절 행사 참석 등 관련 보도를 이어갈 전망이다.

이는 북한이 그간 노동신문 보도에서 러시아를 부각하고 중국은 의도적으로 축소 보도하며 미묘한 ‘반중’ 기류를 보였던 것과 대조된다. 일례로 노동신문은 지난해 12월 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보낸 편지와 이에 대한 답신은 이틀에 걸쳐 1·2면에 전문을 싣고 선전했다. 반면 시진핑이 보낸 연하장은 올해 1월 1일 다른 국가 지도자들과 함께 묶어 짧게 소개하는 데 그쳤다.

이보다 앞서 북한 외무성이 지난해 5월 중국도 이름을 올린 한·일·중 정상회의 공동성명에 '한반도 비핵화'가 거론되자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거나, 중국이 다롄에 설치한 북·중 정상의 '발자국 동판'을 철거했을 때는 양국 관계의 균열로 해석되기도 했다. 지난해 북·중 수교 75주년도 이런 냉랭한 분위기 속에 이렇다 할 이벤트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김정은의 방중 결정으로 분위기가 반전되는 모양새다. 국정원은 지난 4월까지만 해도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에 대비해 리스크 헤징(위험 회피) 차원에서 중국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지만 중국의 북한 길들이기가 지속돼 답보 상태에 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하지만 지난 15일(현지시간) 알래스카에서 미·러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논의가 속도를 내자 김정은으로선 서둘러 시진핑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북·미 대화 재개를 저울질하는 김정은과 안보·통상 등 전 영역에서 트럼프와 정면 대결 중인 시진핑은 대미 레버리지를 높이기 위해 서로를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까지 염두에 둔다면 러시아만으로는 협상력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중국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직전에 방중해 시진핑을 만나 사후 내용 공유와 사전 협의를 했다. 트럼프가 "올해 안에 김정은과 만나겠다"(지난 25일, 한·미 정상회담)며 수차례 북·미 대화의 운을 띄우는 가운데 김정은은 시진핑을 확실한 우군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도 이날 "김정은의 방중은 북·미 대화를 고려해 중·러가 뒷배라는 걸 과시하고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라고 보도했다.

2018년 6월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부가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설주 여사, 김정은 위원장, 시진핑 주석, 펑리위안 여사.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이런 인식은 김정은의 '입'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19일 외무성 주요 국장들과 진행한 협의회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김여정은 "적수국에 외교적으로 선제 대응하고 급변하는 지역과 국제 지정학적 상황을 우리 국익에 유리하게 조종"하기 위한 "김정은의 대외 정책 구상"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해당 협의회는 김정은의 방중이 정해진 뒤 열렸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김정은 방중의 파급 효과와 종전 이후 푸틴과의 관계, 대미·대남 전략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방정식을 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전제는 비핵화가 아니라 군축 협상에 국한돼 있다는 지적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의 후원을 받으며 ‘제재 회피’와 ‘핵무장 정당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며 "김정은은 국제사회로부터 암묵적이라도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이번 전승절 행사도 이를 위한 정치적 '의례'로 활용하고자 한다"고 지적했다.

전승절을 계기로 한 북·중·러 정상 간 회동의 형식도 주목된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CBS 라디오에서 "북·중, 북·러 정상회담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포맷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포맷'이 북·중·러 3자 회의를 의미하느냐는 물음에 위 실장은 "3자의 경우 가능성이 높은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지켜봐야 한다"고 답했다. 다만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계기에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노리는 시진핑으로선 북·중·러 3각 구도를 노골화하는 게 부담일 수 있다.

한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날 출근길에 기자들이 김정은의 방중을 계기로 남북 접촉이 이뤄질 가능성을 묻자 "우리가 '선(先) 북·미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피스메이커'를 하고 그런 분위기 조성을 위해 우리가 옆에서 치고 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다. 한국에선 우원식 국회의장이 전승절에 참석한다.



박현주.심석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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