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7시(현지시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부고니아'는 한국 관객들에게 낯선 동시에 익숙한 작품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괴한 걸작 '지구를 지켜라!'(2003)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부터 영어 리메이크를 추진하던 CJ ENM의 프로젝트는 '지구를 지켜라!'의 오랜 팬이었던 아리 에스터('유전', '미드소마' 등 연출)가 공동 제작자로 합류하면서 탄력을 받았다. 여기에 거장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배우 엠마 스톤, 제시 플레먼스가 탑승하면서 전 지구적 프로젝트로 비행을 시작했다.
"마치 전염병처럼 일벌들이 떠나면 여왕벌만 홀로 남고, 결국 군락은 서서히 무너지지."
'부고니아'의 주인공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벌집 군집 붕괴 현상(CCD: Colony Collapse Disorder)'이 단순히 농약 사용이나 서식지 파괴, 혹은 식량 공급을 조종하려는 정부와 대기업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더 큰 무언가"다. 테디는 자신을 '일벌'로, 회사 CEO인 미셸(엠마 스톤)을 지구라는 군락과 인류를 붕괴시키려는 외계인 '여왕벌'로 규정하고,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미셸을 납치해 고문한다.
원작 '지구를 지켜라'의 이야기를 비교적 충실히 따르는 '부고니아'의 가장 큰 변화는 납치당하는 인물의 성별이다. 원작에서 주인공 병구(신하균)와 조력자 순이(황정민)에 의해 납치당했던 중년 남성 강사장(백윤식)은 '부고니아'에서 두 명의 남성에게 납치당한 아름다운 여성 CEO로 바뀌었다.
엠마 스톤은 특히 그 설정이 불러온 "모호함"을 작품의 매력으로 꼽았다. 테디의 행동이 "선한 자의 옳은 일인지, 미친 자의 미친 짓인지" 관객의 판단을 계속 뒤흔들며 "강렬함과 모호함의 레이어(층위)"를 더했다는 것이다.
'가여운 것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에 이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장 매력적인 실험체로 자리 잡은 배우 엠마 스톤은 '부고니아'에서도 기꺼이 그 실험대에 올랐다.
테디가 미셸의 머리카락을 외계 교신의 GPS로 파악하고 강제로 머리를 밀어버리는 설정을 위해 엠마 스톤은 실제 촬영에서 삭발을 감행했고, 대신 그 자리를 관객과의 교신에 대한 희망으로 채워나갔다. 베니스 현지에서 만난 엠마 스톤의 머리는 어느덧 경쾌한 숏컷으로 자라 있었다.
영화의 제목인 '부고니아'는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자연 발생한다고 믿었던 고대의 의식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그리스 출신의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부고니아'가 표면적으로는 외계인의 존재에 관한 음모론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를 좁은 믿음의 틀에 가두어 버리고, 이미 믿고 있는 것만 강화해 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드는 오늘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엠마 스톤은 쏟아질 듯한 눈빛으로 감독보다 더 열정적으로 '부고니아'의 탄생 당위를 강조했다.
"인류는 태초부터 누군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길 필요로 했어요.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 홀로 던져진 존재들이니까요.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미쳐가는 세상 속에서 균형을 얻는 거죠. 지금은 단지 연결 방식이 너무 많아져서, (좁은 믿음의) 토끼굴에 빠지기 더 쉬워졌을 뿐이에요."
제시 플레먼스 역시 "신이든 외계인이든, 지금 우리가 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누군가가 이 모든 걸 조종하는 실을 당기고 있기를 바라는 욕망은 때론 위험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 미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2023년 '가여운 것들'로 제80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 '부고니아'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포함한 21편의 경쟁작들과 함께 다시 한번 제82회 황금사자상을 놓고 9월 6일 폐막까지 경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