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밤 9시 45분(현지 시간), 이탈리아 베니스의 살라 그란데 극장에서 열린 월드 프리미어에서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9분이 넘는 기립 박수를 받았다.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13년 만에 진출한 한국 영화다.
배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염혜란, 이성민과 차례로 포옹을 나눈 박찬욱 감독의 얼굴에는 긴 항해를 끝마친 이의 감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박 감독이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원작 소설 『액스』를 영화화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무려 20년 전. 그는 “제작비가 마련되기까지, 한 마디로 ‘돈’ 때문에 기다려야 했던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지난 20년 동안 어느 나라, 어느 시기에서든 사람들이 ‘정말 공감되는 이야기다, 시의 적절하다’는 반응을 보여줬고, 결국 언젠가는 반드시 만들어질 수 있는 작품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25년이 겹쳐지는 부지런한 활동 기간 동안 한 번도 함께할 기회가 없었던 배우 이병헌, 손예진이 나란히 참여하면서, 마침내 '어쩔수가없다'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살겠다는 결심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 만수(이병헌)는 25년 인생을 바친 제지 공장에서 해고 당한 후 1년째 구직 활동 중이다. 치열한 취업 전선에서 “전쟁 중”이라 믿는 만수는 유일한 일자리를 차지하게 될 경쟁자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그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내 식구들 입에 밥을 넣어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라 믿으며.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이 제목은 절박한 상황에 대한 당위 혹은 과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를 되묻는 반어법이다. 박 감독은 “여러 인물이 여러 상황에서 같은 말을 하지만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처음 제목을 지을 때는 비겁한 변명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 탓을 하며, 자기의 선택이 아니었다며 합리화하는 말인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늘 쓰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얼마나 이 표현을 무심히 사용하고 있는 지를 자각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박 감독의 전작 '헤어질 결심'(2022)을 가수 정훈희의 노래 '안개'가 자욱하게 감싸고 있었다면 '어쩔수가없다'에서는 조용필의 노래 '고추잠자리'가 인물들 사이를 격렬하게 비행한다.
“조용필 씨는 혁명가를 들어야 하는 80년대 대학생이었던 저에게는 길티 플레저를 느끼면서 숭배하던 아티스트입니다. 언젠가 (영화를 통해) 존경심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 노래는 이병헌, 이성민, 염혜란이 만들어내는 육체적·감정적 앙상블과 함께,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힐 순간에 울려 퍼진다. 이병헌은 이 거대한 소동에 대해 “설득력 있게 그리고 육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고 제일 기억에 오래 남는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박희순은 “한국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포복 절도를 했는데 베니스에서 다시 보니 눈물이 났다.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을 주는 굉장히 묘한 영화”라는 소감을 전했다. 이성민은 '어쩔수가없다'를 “영화 제작사 이름인 ‘모호’와 달리 박찬욱 감독이 만든 가장 메시지가 ‘명확’한 영화”라고 평가했다.
염혜란은 “실업 문제,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다. "박찬욱 감독이 무조건 가을에 찍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알겠더라"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수순을 담고 있는, 그래서 많은 분들이 공감할 영화"라고 덧붙였다.
베니스는 영화 '어쩔수가없다' 제작의 종착역인 동시에 전 세계 관객을 만나는 여정의 출발지다. 9월 17일 시작하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어쩔수가없다'는 9월 24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또한 '토론토국제영화제' '뉴욕국제영화제' 등의 북미 프리미어를 거쳐 배급사 NEON을 통해 북미 지역 관객들과 만난다. 2026년 오스카 레이스를 내다보는 긴 항해를 막 시작한 셈이다.
'어쩔수가없다'는 영화제 5일 차인 8월 31일, 공식 데일리(Daily Ciak)에 따르면 공개된 경쟁작 8편(총 21편) 중에서 가장 높은 별점(3.6)을 기록하고 있다. 개막작인 파올로 소렌티노의 '라 그라치아'(3.5)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3.5)을 앞선 결과다.
국제 평론가 별점도 '어쩔수가없다'에 최고점과 고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상태다. 이병헌의 연기에 대한 호평 역시 이어지고 있다. 데드라인 영화 평론가 데먼 와이즈는 "'어쩔수가없다'는 이병헌이 코미디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배우임을 증명하는 작품"이라며 “마치 매즈 미켈슨과 버스터 키튼이 뒤섞인 듯한, 기존 틀을 뒤흔드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고 평했다.
9월 6일 폐막하는 베니스영화제에서 '어쩔수가없다'가 황금사자상 혹은 남우주연상 볼피 컵을 품게 되는 기대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