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7월 중순 엔비디아의 저사양 반도체 H20의 중국 수출을 허가했다. 2주 뒤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인공지능콘퍼런스(WAIC)에서 중국의 빅테크들은 독자 기술에 기반한 인공지능 반도체를 속속 공개했다.
화웨이는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 클러스터 아틀라스를, 알리바바는 일체화 인공지능 칩을 자랑했다. 그리고 2주 뒤, 중국 정부는 안보상의 이유로 H20의 사용 제한을 권고했다. H20의 중국 수출을 재허가한 것은 치명적인 정책 실수라던 비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은 H20의 사용 제한으로 맞받아치는 배짱을 보여줬다. 중국은 최근까지만 해도 가짜 회사를 세워서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우회 밀수하고, 필요한 부품만 추출해서 재활용하는 등 온갖 고육지책을 구사했다. 어떻게 이처럼 빠르게 H20을 차버릴만큼 자체 기술 상용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비결이 무엇일까.
미국 H20 수출 허락 차버린 중국
정부·기업·대학, 산업연맹 결성
AI관련 전 과정 기술자립 선언
한국도 혁신 연구조직 세워야
2018년부터 풀 스택 자립화 기획 앞서 언급한 세계인공지능콘퍼런스(WAIC) 2025에서 중국의 반도체 설계기업 바이런, 그래픽 칩 개발기업 무어 스레즈, 그리고 화웨이까지 수많은 인공지능 가치사슬의 기업들이 함께 ‘모델-칩 생태계 혁신 연맹’의 설립을 공식 발표하고 인공지능과 관련한 전 과정(풀 스택·Full-stack)에서 기술 자립을 선언했다. 사실 중국은 이미 2018년 중국 공신부 주도로 설립된 ‘인공지능 산업발전 연맹(AIIG)’을 통해 풀 스택 자립화를 시도해 왔다. 당시에도 중국 정부는 신속한 인공지능의 산업화 확산을 위해 인공지능 원천 기술 보유 기업, 플랫폼 기업부터 이를 활용하는 제조 기업까지 모든 이해 관계자의 최고경영자, 수석 과학자를 모두 참여하게 해 중국 인공지능 초고속 사업화를 추진했다.
중국이 추진하는 첨단 분야의 산업연맹은 정부-기업-대학이 함께 최첨단 미래 기술을 탐색·기획하고, 연관된 시장 수요를 동시에 연동하며, 궁극적으로 이를 자국 및 국제 표준으로 확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혁신 공동체의 성격을 지닌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강력한 당근과 채찍을 같이 제시하기 때문에 기업들은 앞다퉈 산업연맹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며 자사의 기술이 채택되도록 노력한다. 이후 일련의 조정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불필요한 중복 개발을 줄이고, 사실상의 기술 표준을 선정하고 공공 도입을 연계시켜 첨단 기술의 혁신 성장전략을 실행에 옮긴다.
이러한 첨단 기술의 신속한 사업화가 전통적인 연구개발 및 사업화 체계에서 작동이 어려운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경직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중국이 채택한 방식은 ‘연구개발-사업화-표준화’를 한꺼번에 담당하는 새로운 성격의 신형 연구개발 기구 설립이다. 신형 연구개발 기구는 중국이 기존의 연구개발 및 사업화의 단절화를 해결하기 위해 통합적 혁신을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혁신 주체이다. 중앙-지방정부간 협력, 기업과 공공 연구소의 공동 출자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보다 유연하고 신속한 혁신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공지능 및 반도체 분야의 대표적인 신형 연구개발 기구인 베이징 즈위엔 인공지능연구원(BAAI)은 중국 과기부와 베이징시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칭화대·베이징대·중국과학원이 주도하고 바이두·바이트댄스·샤오미 등의 혁신기업이 참여하는 조직이다. 원천형 혁신 기술의 개발뿐 아니라 혁신 생태계의 조성, 혁신 인재의 육성과 유치, 기업 혁신 지원, 그리고 국제화까지 동시에 수행하는 복합적 혁신 주체다.
인공지능의 빠른 변화를 따라가기 위한 중국의 조직 설계 실험 역시 이 전에도 있었다. 딥러닝이 세계를 강타한 2018년 중국 정부는 빠른 산업화를 위해 새로운 형태의 국가실험실인 ‘공정연구실’ 제도를 신설하였고, 바이두-칭화대학의 공동 연구실을 바이두에 설치하였다. 유사한 형태로 알리바바와 중국과학원의 연합연구실도 알리바바에 설치해서 민간의 민첩함과 국가연구소와 대학의 기초 연구 역량이 융합되어 빠른 사업화를 실현했다.
빠른 사업화 위한 우리만의 대책 중국 정부가 몇백 조원을 투입하고 있는지, 몇천 명의 과학자들을 얼마를 주고 데리고 왔는지, 중국의 연구 인력들이 일주일에 몇 시간 일하고 얼마나 밤새우는지가 중국의 빠른 기술혁신 사업화의 본질이 아니다. 중국 기업과 대학이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살아간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중국이 어떻게 혁신 공동체를 설계하고, 혁신 프로세스의 파격적 효율화를 실현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를 작동하게 했는지다. 미국과 중국이 연이어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자국 중심의 풀 스택 AI 액션플랜을 발표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AI 국가전략 위원회가 출범을 앞두고 있다.
우리의 AI 전략은 대대적이고 전폭적인 투자와 함께 투입된 자원이 어떻게 더 큰 시너지를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 산·학·연·관이 공동으로 미래 기술과 시장을 기획하고 신속한 사업화를 위한 수요 연계 전략을 함께 설계하자. 대통령 직속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새로운 연구조직을 만들자. 기술별로 선정한 국가 최고 전략연구단에는 연구개발뿐 아니라 상용화와 국제 표준화까지 통합적으로 추진하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자. 겉만 다른 조직이 아니라 임무와 일하는 방식·보상이 다른 새로운 혁신 주체를 탄생시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