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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로 만든 작품, 트라우마를 지웠다

중앙일보

2025.08.31 08:44 2025.09.0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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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루이즈 부르주아 개인전에 출품된 '웅크린 거미'.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수변공간에는 높이 9m, 너비 10m에 달하는 거미 형상의 거대한 조각 작품이 있다. 제목은 프랑스어로 ‘엄마’라는 뜻의 ‘마망(Maman)’(1999)으로, 현대미술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프랑스계 미국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왜 ‘마망’일까. 작가는 생전에 “알을 품은 암컷 거미를 통해 내 어머니의 모성을 표현했다”고 설명했지만, 부르주아의 작품 세계는 위협적인 동시에 나약해 보이는 거미만큼 미스테리였다.

마망과 부르주아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전시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이 지난달 30일 호암미술관에서 개막했다. 내년 1월 4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국내에서 25년 만에 열리는 부르주아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회화, 조각, 설치 등 총 106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덧없고 영원한’이란 제목은 작가가 생전에 쓴 글에서 따온 것으로, 남성성과 여성성, 강한 것과 나약한 것, 사랑과 분노 등 서로 대립하며 균형을 이루는 요소로 점철된 부르주아의 작품 세계를 함축한다.

전시장 초입 눈길을 끄는 것은 한 소녀가 트렁크를 들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담은 1938년 작 자화상이다.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중반 미국인 미술사학자 로버트 골드워터와 만난 지 19일 만에 결혼해 삶의 터전을 미국으로 옮겼다. ‘밀실(검은 날들)’(2006)도 주요 작품 중 하나다. 부르주아는 1991년부터 ‘밀실’이라 불리는 방 형태의 설치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점의 ‘밀실’ 연작을 제작했다.

‘아버지의 파괴’, 237.8x362.3x248.6㎝, 글렌스톤미술관 소장. © The Easton Foundation / Licensed by SACK, Korea
부르주아의 작업엔 부모와 얽힌 어린 시절이 큰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태피스트리 수선 일을 했는데, 그에겐 늘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와 거미의 실 뽑는 행위가 하나로 겹쳤다. 가정교사와 10년간 외도를 한 아버지는 그에게 분노의 대상이자 성적 혼란의 근원이었다. 전시에 나온 작가의 2008년 인터뷰 영상엔 울먹이며 아버지 얘기를 털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영상 바로 옆에 설치된 작품 ‘아버지의 파괴’는 붉은 조명 아래 고깃덩이들이 놓인 듯한 식탁이, 말 그대로 아버지를 ‘파괴’하는 어두운 판타지를 강렬하게 전한다. 이진아 큐레이터는 “작가는 ‘어린 시절 식탁에서 아버지를 끌어내려 먹어 치우는 상상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며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분노와 불안을 응축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손을 통해 안정감 있는 신뢰 관계를 표상한 작품 ‘손’. [사진 호암미술관]
그러나 노골적이고 대담하고 어두운 작품들 사이사이 사랑과 신뢰에 대한 간절함이 발견된다. 대리석 조각 ‘손’도 그중 하나로 깊은 신뢰 관계를 표상한다. 붉은 과슈로 그린 ‘꽃봉오리’ 연작에선 ‘가족’이란 주제가 읽힌다. 부르주아는 창작을 통해 두려움과 불안 등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나갔고, 자신을 해방했다. 그가 “예술가로 사는 것은 특권”이라고 말한 이유다.

'루이즈 부르주아, 2003.사진: 낸다 랜프랭코 ⓒ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SACK, Korea.
이번 전시엔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을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이 소장한 부르주아의 대표작 13점도 함께 나왔다.





이은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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