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현지시간) 영국 울버햄프턴의 몰리뉴 스타디움에서 열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에버턴과의 경기.
울버햄프턴 공격수 황희찬(29)이 전반 21분 1-1 동점골을 터트렸다. 오른쪽 측면에서 팀동료(마셜 무네치)가 크로스를 올려주자, 그는 별명 ‘황소’처럼 수비수 사이를 뚫고 저돌적으로 돌진했고, 이어 강력한 논스톱 왼발슛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이적설이 돌던 황희찬의 시즌 첫 골이자, 8개월만의 프리미어리그 득점이었다.
이날 황희찬은 득점 후 손목에 입을 맞춘 뒤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목에는 조부모의 한자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지난달 25일 향년 93세로 하늘나라로 떠난 할아버지 황용락씨를 향한 골 세리머니였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던 황희찬은 어릴 적 조부모 손에 자랐다. 황희찬의 부친 황원경씨는 “희찬이가 초등학생 때 부천에서 증조할머니까지 4대가 함께 살았다. 대가족 9명이 함께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황희찬은 효심이 깊었다. 2022년 카타르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극장골로 16강 진출을 이끌었을 땐, 귀국하자마자 조부모댁으로 달려가 경기 최우수선수 트로피를 안겼다. 한때 염색을 했던 이유에 대해 ‘조부모가 손자를 잘 알아보시라고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황원경씨는 “한국에서 TV로 희찬이의 득점을 지켜본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하며 엉엉 우셨다”고 전했다. 영국에서 함께 지내는 어머니에 따르면, 황희찬도 부고를 듣고 많이 울고 한동안 방에서 안 나왔다고 한다. 유럽에선 시즌 중이라도 가족의 장례·결혼 등 경조사가 있으면 고국에 다녀오는 게 당연시된다. 하지만 가족들은 “할아버지는 당장 장례식에 오는 것보다 손자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더 바라실 거야”라고 만류했다고 한다.
결국 황희찬은 귀국하는 대신 지난달 26일 소셜미디어(SNS)에 추모의 글을 올렸다. 그의 할아버지 황용락씨는 6·25 참전용사였다. 아버지 황원경씨에 따르면 6·25 때 해병대 5기로 입대해 6년간 복무했고, 종전 후 하사로 제대했다. 황희찬은 “실제 겪었던 전쟁 얘기를 해주면 믿기지도 않고 신기했지만, 그런 분이 내 할아버지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웠다”며 “할아버지에 비하면 정말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지만, 대표선수로서 조금이나마 기여했던 부분에서 할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손자였으면 좋겠다”고 썼다.
슬픔을 삼키고 팀에 남은 황희찬은 다음날 웨스트햄과 리그컵 경기에서 나섰지만,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비토르 페레이라 울버햄프턴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희찬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친밀한 관계였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한국에 가야 하지 않겠냐고 물으니 팀을 돕기 위해 여기 남겠다고 했다. 그의 인품에 찬사를 보낸다”고 했다.
유럽프로축구는 이달 1~9일 A매치 휴식기에 돌입한다.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황희찬은 일시 귀국해 참전용사 할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이천호국원을 찾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