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에는 ‘뼈를 깎는’이란 수식어가 공식처럼 따라붙는다.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다. 이해관계로 얽힌 당사자가 여럿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정부는 1년 이상 묵힌 석유화학(석화)산업 구조조정 작업을 다시 기업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석화기업마다 처한 상황, 생존 방식이 다른 만큼 구조조정의 길이 험난할 수 있다.
중앙일보가 국내 석화사 10곳을 익명으로 전수조사한 결과 ‘공장 가동 중단을 포함한 구조조정’을 자구책의 우선순위(1~3순위)로 꼽은 회사는 4곳에 불과했다. 10곳은 LG화학·롯데케미칼·SK지오센트릭·한화토탈·대한유화·한화솔루션·DL케미칼·GS칼텍스·HD현대케미칼·에쓰오일이다. 지난달 20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연간 국내 에틸렌 생산량의 최대 25%(370만 톤)를 줄이는 내용의 ‘석유화학(석화)산업 재도약 추진 방향’을 발표하며 자율협약을 맺은 곳이다.
구조조정은 공장 가동 중단, 인력 감축의 다른 말이다. 하지만 석화사 10곳 중 6곳은 구조조정을 우선 순위에 올리지 않았다. 회사마다 정부가 유도한 ‘나프타분해시설(NCC) 감축’ ‘타사와 설비 통폐합’ ‘정유-석화 수직계열화’를 추진하겠다고는 하면서도 정작 ‘내 공장’은 계속 돌리겠다는 식이다. 석화 구조조정을 기업 자율에 맡겨 지원하되, ‘무임승차’하는 기업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정부 방식과 어긋난다.
석화업계도 자율 구조조정 방식에 회의적이다. 그렇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면 진즉 해결됐을 거란 의미다. A 석화업체 관계자는 “구조조정도 방향과 강도가 있는데 지금은 한 회사가 주력 사업을 완전히 접든지, 두 회사가 한 회사로 합치든지 해야 하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며 “회사 입장에선 경쟁사와 기싸움을 해야 하는 의사결정을 ‘기업끼리 알아서 하라’는 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B 석화업체 관계자는 “모그룹이 석화 사업에 확고한 의지를 가진 회사, 모그룹이 정유사를 함께 가진 회사, NCC가 주력인 회사, 자금 여력이 충분한 회사, 당장에라도 석화 사업을 털고 싶은 회사 등 사정이 천차만별”이라며 “조금만 버티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느 기업이 선뜻 ‘나부터 공장을 닫겠다’고 나서겠느냐”고 털어놨다.
구조조정의 실행 가능성부터 차이가 있다. LG화학·SK지오센트릭처럼 그룹 내 단독 지배구조를 갖춘 기업은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GS칼텍스(GS에너지·셰브론), 현대케미칼(HD현대오일뱅크·롯데케미칼), 여천NCC(한화솔루션·DL케미칼), 한화토탈에너지스(한화임팩트·토탈에너지스) 등은 합작사(JV) 형태라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가 최대주주인 에쓰오일은 오히려 석화 사업을 늘리는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기업들의 동상이몽(同牀異夢)은 뚜렷했다. 누적 적자가 심각해 이미 일부 공장이 가동을 멈춘 회사조차 우선 순위에서 구조조정을 미뤘다. 3곳은 정부가 1순위 구조조정 과제로 꼽은 NCC 감축을 검토 대상으로 올리지 않았다. 또 다른 3곳은 그룹 내에 정유사가 없는데도 정유사와의 수직계열화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다만 9곳이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을 우선 순위로 꼽았다. 범용 제품 생산에 치우친 현재 사업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진단만큼은 일치했다.
문제는 대기업 위주로 수십 년간 구축한 석화업계가 자율적으로 설비를 통폐합하고 인수합병(M&A)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여천NCC는 최근 신규 투자를 두고 대주주끼리 갈등을 빚으며 부도설까지 불거졌다. 기업 간 이해관계가 맞물릴 경우 상징적인 몇 건의 통폐합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대적 수준의 구조 개편은 어려울 것이란 게 중론이다.
이번 정부 발표에서 구조조정의 세부 방향이나 구체적인 지원책은 빠졌다. 정부가 더 늦기 전에, 키를 잡고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창윤 삼일PwC 파트너는 “구조조정은 속도와 현금이 생명이다. 더 강한 규제 해소, 현금성 인센티브가 있어야 단기간에 구조조정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