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전남 여수시 국가산업단지 내 여천NCC 제3공장. 국내 언론 최초로 찾은 이곳은 한 달만 해도 비행기 엔진 같은 굉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날은 적막만 흘렀다. 섭씨 1200도 공정이 진행 중이었다면 굳게 닫혔을 관찰창(peep door)으로는 바람과 먼지만 드나들었다. 국내 3위 에틸렌 생산업체인 여천NCC가 지난달 8일 연간 생산량의 20%(48만t)를 차지하던 3공장을 중단하고 1·2공장에서 합쳐 생산하기로 하면서다. 전기요금·인건비 등을 줄이기 위해서다. 이 회사는 올해 상반기 1567억원의 적자를 냈다.
여수산단은 여천NCC뿐 아니라 GS칼텍스·롯데케미칼·LG화학 등 대형 석유화학·정유 공장들이 파이프랙(이송관로)으로 촘촘히 연결돼 있다. 대부분 석화 기초유분인 에틸렌 등을 생산하는 ‘나프타분해시설(NCC)’ 공장이다. 정유사인 GS칼텍스도 이곳에서 NCC의 일종인 ‘올레핀생산시설(MFC)’을 운영하며 에틸렌을 만든다. 들어가는 원료의 종류만 다를 뿐 공정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같은 날 방문한 충남 서산시 대산산단도 침울한 분위기는 비슷했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대산산단 NCC 가동률은 2021년 90%대에서 지난해 70%대로 뚝 떨어졌다. 이곳 역시 차로 20분이면 오가는 거리에 밀집한 롯데케미칼·HD현대케미칼·LG화학·한화토탈에너지스 등이 각자 NCC 공장을 돌리고 있다.
2022년부터 시작된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업황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NCC 간 구조조정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기업들은 ‘담 하나’를 두고 여전히 같은 제품을 찍어내며 버티고 있다. 글로벌 에틸렌 공급이 수요 대비 넘쳐나면서 에틸렌 가격도 2021년 t당 1046.67달러에서 지난해 863.06달러로 급감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밑단에 위치한 하청 근로자들부터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20년 넘게 여수산단에서 일한 하청 근로자 조영근(58)씨는 여수의 ‘황금기’를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산단이 잘 나갈 때는 늘 어딘가 고치고 넓혔다. 바쁠 때는 한 달 20일가량 일감이 꽉 찼다. 산단 주차장이 부족할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지난 4월부터 일감이 없어 집에서 쉰다. 5월부터 나오는 월 180만원가량 실업급여로 대학생과 고3 딸을 키운다. 조씨는 “어떻게든 나가서 일해보려고 전화통만 붙잡고 있는데 지난달 하루 일했다”며 “20년 이상 일하는 동안 최악의 불황”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4월 처음 카드 대출 500만원을 받았다. 월 10만원씩 갚으며 만기를 연장하는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했다.
산단 위기는 지역 경제마저 덮쳤다. 여수시와 서산시의 지난해 지방세 징수액은 각각 전년 대비 26.8%, 19.7% 급감했다. 서산시청 관계자는 “대산산단은 서산시 지역 경제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성이 큰데, 산단이 어려워지니 그대로 타격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여수시청 관계자도 “여천NCC 등 산단 채용 창구가 사실상 닫히면서 지역 고교에선 진로 지도가 막막해졌다는 하소연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회복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석화업계에선 ‘중국의 설비 증설로, 기존 업황 사이클은 이미 망가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은영 삼일PwC 경영연구원 상무는 “중국에 더는 제품을 판매하기 어렵게 된다면 한국은 공급과잉 상태에 빠진다”며 “결국 울산·여수·대산 산단마다 존재하는 NCC 설비 통폐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2021년만 해도 9조4576억원이던 석화업체 10개사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1조4866억원 적자로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업계에선 자율적인 구조조정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분위기다. 한화와 DL이 합작한 여천NCC는 지난달 갈등의 골이 최고조 수준으로 치솟았다. 양사 모두 여천NCC에서 생산된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유분을 공급받고 있지만, 다운스트림(완제품 제조) 사업 방향이 다르다 보니 에틸렌 공급가를 놓고 씨름한다. 대산산단에서 NCC 통합을 논의하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도 설비 가치 산정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가격·생산량 협의가 공정거래법상 담합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점도 기업들이 소극적인 배경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미루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0일 ‘선(先) 자구노력, 후(後) 지원’ 원칙을 내세우며 연말까지 각사가 자구책을 내놓으라고 밝혔다. ‘자율 협약’ 명목으로 전체 생산능력의 18~25% 해당하는 270만~370만 톤(t) 규모의 에틸렌을 감축한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지금과 다를 바 없다” “차라리 정부가 가르마 타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나마 지난 28일 여수시에 이어 서산시도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하는 등 정부도 긴급 처방에 들어갔다. 오는 2027년 8월까지 2년간 긴급경영안정 자금, 지방 투자 촉진 보조금 우대,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금융 강화 등이 지원될 예정이다. 다만 당장의 위기 극복을 위한 진통제 역할에 그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정환 민주노총 플랜트건설노조 여수지부장은 정부의 뒤늦은 대책에 대해 “석화 불황이 10년 전부터 나오던 얘기인데 너무 늦었다”면서도 “어떻게든 살려낸다는 의지라도 확실히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더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3년간 사실상 정부가 손을 놓은 것”이라며 “이제는 정부가 최소한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먼저 제시해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도 “정유사나 석유화학사 모두 투자 여력이 부족한 상황인 만큼, 구조조정에 성공한 기업을 선별해 파격적으로 설비 투자와 금융을 지원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장 버틸 수 있는 응급 처방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진명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석유화학 업계는 3년째 적자가 이어지며 고정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가동률이 떨어져 있다”며 “당장 필요한 것은 단기 유동성 지원이나 세제 혜택 같은 응급처방을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누적된 적자를 해소하고 에틸렌 생산 감축을 통해 수급 불균형을 완화하는 것이 숨통을 틔우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