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일본 석유화학 기업의 사업재편 사례를 배워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일본은 정부 주도의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범용(기초) 제품에서 고부가가치의 스페셜티 제품 위주로 체질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다만 한국은 일본과 달리 스페셜티 시장의 후발주자인 만큼, 연구개발(R&D) 투자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31일 삼일PwC경영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일본 석유화학 구조조정 사례와 시사점’ 보고서 등에 따르면 일본은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를 ‘세 번의 칼춤’으로 돌파했다.
1980년대 초 1차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오일쇼크 여파로 수익성이 악화하자 정부가 특별산업구조개선임시조치법(산구법)을 제정하며 칼을 빼 들었다. 노후하거나 중복된 나프타분해시설(NCC) 폐쇄를 명령했고, 기업들은 NCC를 통합해 가동률을 끌어올렸다.
1990년대에 있었던 2차 구조조정에선 시장의 자발적인 인수합병(M&A)을 유도했다. 산업활력재생특별조치법(산업재생법)을 도입해 합병·분할 기업들에 세제 특례를 주고, 공정거래법 심사도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으로 진행했다. 그러자 기업 간 ‘빅딜’이 활발해졌다. 미쓰비시화성과 미쓰비시석유화학이 합병해 현재 일본 1위 종합화학업체인 미쓰비시화학이 출범한 시기(1994년)도 이 때다. 범용 제품인 폴리에틸렌(PE)과 폴리프로필렌(PP) 생산업체는 1994년부터 2006년까지 각각 14개→8개, 14개→4개로 줄었다. 동시에 기업들은 전자소재·의료기기 등 스페셜티로 포트폴리오를 넓혔다.
2000년대 3차 구조조정 때는 정부가 규제 완화·세제 인센티브 등 간접 지원만 남겨 뒀다. 기업들은 ‘콤비나트’(상호 보완적인 공장 등을 한 지역에 모은 기업집단) 통합과 해외 생산기지 확장으로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일본 석유화학 업체들의 사업재편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미쓰이화학은 저수익 사업 구조조정을 위해 기초 및 그린소재 사업부를 2027년까지 분사한 뒤 다른 회사와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일본처럼 과잉 설비를 과감히 폐쇄하고, 스페셜티로 다각화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일본이 40년에 걸쳐 해낸 체질 개선을 한국은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실행해 급한 불을 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스페셜티 분야 R&D에 더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1년부터 2023년까지 미쓰비시화학 등 일본 주요 석유화학 6개사의 평균 매출액 대비 R&D 비중은 3.9%였는데, 같은 기간 한국 4개사(LG화학·롯데케미칼·대한유화·금호석유화학)의 평균은 0.9%에 그쳤다.
이상원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전통의 소재 강국인 일본은 중소기업부터 스페셜티 공급망이 탄탄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라며 “정부가 스페셜티 R&D 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동시에 정밀화학 분야 중소기업을 키울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