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주는 없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인터뷰 기사를 접하고 깊은 사유에 잠겼습니다. 사주명리학을 10년 넘게 공부했다는 한 박사는 사주가 과학적 근거가 없고, 통계적 유효성도 없으며, 결국 ‘혹세무민’의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만세력이 틀렸는데도 용하다고 하더라’는 개인적 경험과 ‘통계 데이터가 없다’는 점, 그리고 ‘유명 지식인들의 혹세무민’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주장이 사주명리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겉핥기식으로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주명리학을 깊이 연구한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이 박사의 주장이 왜 사주명리학의 진정한 가치를 간과하고 있는지 차분히 반박하고자 합니다.
1. 인과론적 잣대는 사주명리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이 박사는 사주명리학을 "인과적 연관성 없는 점술"이라고 규정하며, 과학의 잣대로 재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시(詩)를 화학 공식으로 분석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사주명리학은 물질의 인과관계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와 삶의 의미를 다루는 인문학의 영역에 속합니다.
인간의 삶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의 공식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A라는 사건이 B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인과론적 접근은 인간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적 사고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주명리학은 삶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목적론적 접근을 취합니다.
이 박사 스스로가 '언어와 현실의 관계'를 들어 현실을 구성하고 인식하는 힘이 언어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사주명리학의 핵심입니다. 사주명리학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미래를 맞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말씀의 씨앗"을 심어주고, 그 말씀이 현실로 꽃피우도록 응원하는 데 있습니다.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에게 "장차 커서 장군이 되겠네"라고 덕담을 건네면, 그 덕담이 씨앗이 되어 아이의 삶에 장군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에게 '절처봉생(絶處逢生, 죽을 곳에서 살길을 찾음)'의 지혜를 전하는 것이 사주명리학의 역할입니다. 과학적 인과관계가 아닌, 위약효과(Placebo effect)로도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의 언어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2.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 박사는 사주명리학을 자연과학의 좁은 틀 안에 가두고, 인과론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비과학이라 단정 짓습니다. 이는 과학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과학의 영역에는 자연과학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과학, 인문과학, 역사과학, 심지어 종교과학이라는 말까지 존재합니다. 이들은 자연과학처럼 인과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관찰과 추론, 그리고 증명의 과정을 거치는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기에 '과학'으로 불립니다.
기상캐스터의 날씨 예보가 종종 틀려도 우리는 기상학을 비과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자의 경기 예측이 빗나가도 경제학을 미신이라 치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주명리학자가 분석한 내용이 간혹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비과학이나 미신으로 여기는 것은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과학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간과한 오류입니다. 사주명리학 또한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그 흐름을 추론하며, 통계가 아닌 원리의 유효성을 증명해온 인문과학의 한 갈래입니다.
3. '모른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박사는 사주명리학의 뿌리를 찾기 위해 수십 권의 고문헌을 뒤졌지만,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토로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유로 사주명리학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합니다. 이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오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신이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과학자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 박사가 허점투성이라고 본 사주명리학은 죽음의 문턱에서 서 있는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 하나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면 허점투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신을 모르면서 종교가 허점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주명리학은 단순히 '점'을 보는 미신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심오한 인문학입니다. 이 박사의 주장처럼 사주를 얄팍한 통계와 개인적 경험의 한계 속에 가두는 것은, 한 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깊은 지혜를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주명리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지식인의 겸손과 인문학자의 태도가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박사의 태도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박사는 스스로의 학문적 부족함을 고백하기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학문 자체나 그 가르침을 준 스승에 대한 모독적인 언사를 쉽게 사용합니다. "낭월 스님이 내 주장을 인정했다"고 단언하는 그의 태도는 점잖은 인문학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낭월 스님이 "빅뱅 이전을 모르는데 어디에서 근거를 찾겠느냐"고 한 말씀이나 "농부는 농사 잘 지을 생각을 해야지 밭고랑 몇 개인지 헤아리느라 애쓸 필요 없다"고 말했다는 대목은, 사주명리학의 원리가 인간의 이성과 언어적 한계를 초월하는 영역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사주명리학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입니다. 사주팔자의 글자 몇 개에 집착하며 '이것이 맞다, 틀리다'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주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자신이 쌓아온 10년의 공부를 부정하는 용기는 높이 살 만합니다. 그러나 그 부정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가르침을 준 스승과 학문 자체로 향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겸손을 잃은 태도입니다. 진정한 학문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박사의 마지막 한 걸음이 자신에 대한 메타적 인지와 성찰이었다면 그의 글은 훨씬 더 깊이 있는 울림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수 남다른
글을 기고한 명리학자 남다른 선생은 한국외국어대학을 졸업한 뒤 ㈜비씨카드에 입사해 정보시스템, IT기획담당 임원(CIO)으로 일했다.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에서 겸임교수로 강단에 섰고 현재 CCQ 포춘 대표이사이다. 저서로는 생극제화의 원리를 규명한 '여수명리'(2020년)가 있는데, 단순한 점술가가 아닌 명리학의 학문적 지위를 재정립하는 연구자로서 전통 이론의 현대적 확장과 체계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