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말 울산 남구 선암동의 한 편의점. 매일 같은 시간, 삼각김밥 하나만 집어 들던 60대 여성이 이날도 계산대 앞에 섰다. 몇 달째 같은 모습을 지켜본 50대 점주 김모씨는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 느꼈다. 그는 계산대 포스기 화면 속 '신고 버튼'을 누른 뒤 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손님이 계속 삼각김밥만 사 가세요. 무슨 사정이 있으신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현장에 나온 구청 직원은 여성의 안타까운 사정을 확인했다. 남편을 잃고 우울증을 앓던 이 여성은 식사를 챙기지 못해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후 지역 복지 서비스와 연결돼 음식 바우처와 복지사의 관리를 받으며 웃음을 되찾아가고 있다.
24시간 불을 밝히는 동네 편의점이 '마을의 눈' 역할을 하며 어려운 이웃을 찾아내고 있다. 울산 남구가 지난해 11월 시작한 '편의점 위기 이웃 발굴 사업'이다. 점주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손님을 발견하면 포스기 화면의 신고 버튼을 눌러 구청에 알린다. 접수 후 공무원이 현장을 찾아 상담하고, 이미 자리를 뜬 경우에는 이웃을 수소문해 확인한다.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24만원 상당의 바우처(CU편의점 사용)를 지급하고, 생계·주거 지원 등 상황에 맞는 복지 서비스로 연결한다.
바우처 사용 내용을 분석해 지원도 세분화하고 있다. 바우처로 약을 많이 사는 주민에게는 의료 지원을, 식품을 자주 사는 주민에게는 음식 지원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지난 10개월 동안 편의점 사업을 통해 남구에서만 10가구 이상이 새롭게 도움을 받았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위기 이웃이 발견된 셈이다.
발굴 사연도 다양하다. 출·퇴근길마다 편의점을 찾던 40대 손님이 갑자기 낮에만 술과 라면을 사기 시작하자 점주는 신고 버튼을 눌렀다. 확인해 보니 실업급여가 끊겨 생계가 막막해진 상태였다. 그는 주거급여, 바우처 등을 통해 다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결제 금액이 부족해 물건을 내려놓던 한 50대 여성은 뇌경색 후유증에다 보이스피싱 피해까지 겹쳐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상담 끝에 생계·주거급여 지원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희귀질환과 부상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웠던 40대 여성도 편의점 신고 덕분에 의료·생계급여와 밑반찬 지원을 통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암 투병 중인 남편을 돌보던 60대 부부, 형제를 잃고 외로움에 시달리던 70대 독거노인 역시 편의점의 '눈'에 포착돼 도움을 받았다.
편의점 사업은 울산 남구청 복지지원과 김아영 주무관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는 "편의점은 간단한 끼니를 해결하러 자주 찾는 곳이라 작은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CU 본사도 취지에 공감해 참여를 결정했고, 현재 남구 전역의 100여 개의 CU 편의점이 '복지 지킴이'로 활동 중이다. 대전 유성구 등 다른 지자체가 벤치마킹을 검토하며 전국 확산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고 한다.
점주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울산 남구 CU수암신선점 변명숙 점주는 "예전엔 힘들어 보이는 손님이 있어도 방법을 몰라 걱정만 했는데, 이제는 버튼 하나로 도움을 줄 수 있어 마음이 한결 놓인다"고 말했다.
남구 주민 김정숙(66)씨는 "동네 편의점에서 위기 이웃을 찾는다는 게 신기하다"며 "편의점 불빛이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동네를 지켜주는 따뜻한 눈이 되고 있다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서동욱 남구청장은 "편의점 위기 이웃 발굴 사업은 행정이 놓치기 쉬운 작은 신호를 주민들과 함께 발견해내는 새로운 복지 모델"이라며 "위기 이웃이 고립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